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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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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방사우'와 함께한 마지막 입시 「과외방사우(課外房四友)」와 함께한 마지막 입시 교직 생활 두 번째 해인 1969년에 처음으로 6학년을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중학교 진학에 대한 전형 방법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터라, 입학시험이 있는 마지막 해이기도 했습니다. 6학년 담임으로서의 성패는 중학교 합격자 수에 의해 판가름이 나던 때인지라, 거기에 대한 중압감은 일년 내내 어깨를 무겁게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오직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린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온통 담임교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당수는 미리 진학을 포기하든지, 천신만고 끝에 합격을 해도 등록금의 장벽에 막혀 진학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당시 농촌의 실상이었습니다. 입시철이 가까워 오면서 그 준비에 올인 하는 상황이 되었습..
도시락 대신 버거운 짐을 지고 도시락 대신에 버거운 짐을 지고 정남초등학교에서 2년째 근무하던 해였습니다. 문교부 지정 급식 연구학교 운영이라는 커다란 과제가 우리 학교에 떨어졌습니다. 연구학교는 관계 기관의 지정과 예산 지원으로 국가의 교육정책을 학교 교육 과정에 적용하여 그 효과를 검증하는 학교였습니다. 특히 ..
풍금과 빠이롱 풍금과 빠이롱 교단 초임 시절에 내 또래의 조 선생이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조 선생에 첫 인상에 매우 호감이 갔을 뿐 아니라, 나와 같은 6학년을 담임하게 되어 기분이 썩 좋았습니다. 같은 해에 교직 생활을 시작한데다 동갑인지라 곧 허물이 터져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
어설픈 열정 어설픈 열정 모교인 영원국민학교에서 처음으로 6학년을 맡게 되었습니다. 6학년 담임은 내가 바라던 터라 학년 초부터 학생 교육은 물론 학급 경영을 의욕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맡겨준 업무도 군말 없이 척척 처리하는 걸 보고, 한 선배교사는 나에게 아이디어뱅크라는 별명도 붙여주었습..
모교의 교단에 서다. 모교의 교단에 서다.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열 한 해, 선생이 된지 세 해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공부하던 영원초등학교에 선생이 되어 되돌아오던 날, 나는 흥분과 감회로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교실이 있던 자리에는 새 교실이 들어서 있었으나, 드넓은 운동장은 옛 그대로였습니다..
아찔한 운동회 아찔한 운동회 예전에 시골에서의 국민학교 운동회는 학교의 가장 큰 행사임은 물론 지역의 큰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운동회를 위한 연습도 장장 한 달 가까이 계속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9월초에 시작된 연습은 운동회가 열리는 10월초까지 이어졌습니다. 매일 오후는 거의 연습으로 채워졌..
막걸리 문화에 젖어 막걸리 문화에 젖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내가 처음 익힌 것 중의 하나는 막걸리라는 술을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극히 비생산적인 소비문화에 발을 들여놓게 된 셈입니다. 교직에 들어서 처음 근무한 학교에는 주변 마을에서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하는 소위 타지 선생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교단 첫날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교단 첫날에 내 나이 만 스무 살 육 개월,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한 지 열 닷새 만인 1968년 3월 2일 토요일. 이 날은 내가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첫 발을 들여놓은 날입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첫 출근 첫 인사말은 국민학교 시절 등굣길에 나설 때와 다르지 않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