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문화에 젖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내가 처음 익힌 것 중의 하나는 막걸리라는 술을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극히 비생산적인 소비문화에 발을 들여놓게 된 셈입니다.
교직에 들어서 처음 근무한 학교에는
주변 마을에서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하는 소위 타지 선생님들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객지로 발령을 받은 탓도 있지만,
워낙 교통이 불편하여 통근은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집은 학교에서 십여 리 안에 있었으니,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타지 선생님들은 퇴근 후엔 무료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던 터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마을 주막이었습니다.
수업 중에 들이마신 백묵가루는 막걸리로 씻어내야 제격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신봉하는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비록 도로에서 2킬로미터 쯤 떨어진 오지였지만
학교 주변엔 네댓 군데의 주막이 성업하고 있어,
석양 무렵에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주막의 주 메뉴인 막걸리는 값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피로를 풀며 출출하던 배를 채울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간식이기도 했습니다.
주막은 막걸리 잔을 주고받는 가운데 우정을 쌓아가는 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정반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런저런 소문을 확인하고 확대 재생산하며
그럭저럭 시간을 죽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햇병아리교사인 나도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는지라,
선배들의 권유로 그들과 합류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하다보니 비록 술맛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내 몸이 술을 제법 잘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문 선생은 아무리 마셔도 얼굴에 흔적조차 없어. 참 대단해!"
선배들의 달콤한 찬사에 비례하여 갈수록 마시는 횟수나 주량이 늘어나더니,
나는 어느덧 술자리의 주류에 끼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가운데 술자리가 길어지고 얼큰해지면
간간이 학교 일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며 스트레스를 풀어가기도 했습니다.
선배들 중에는 소위 삼총사라 불리는 세 선생님이 있었는데,
특히 학교 일에 비판적인 행태로 공동보조를 취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술자리에서도 이러한 색깔이 그대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정의적이고 개혁적이라고 논리 있게 설명할 때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술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들어가면 몸이 이완되고 정신이 늘어지게 마련이었습니다.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우선 눈앞의 일들에 대해 사려 없이 판단해버리며,
나중에야 오판임을 알고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기다리는 마누라도 없는 총각이 기필코 집에 가서 뭐 할 일 있어?"
이런 말로 옷자락을 잡힐 때면 퇴근 후의 술자리가 길어지고
숙직실에서 자는 경우도 간간이 생겼습니다.
이 경우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숙직하는 직원에게 얹혀서 해결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전날 밤 늦게까지 술자리에 동석한 인근 마을 거주 선생님이
아침 식사 시각에 맞추어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습니다.
젊은 선생이 아침부터 선배 선생님한테 민폐를 끼쳤으니,
햇병아리 교사의 철없음이 후회가 되고 처신을 바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료교사에 대한 비난적 분위기가 너무 심할 경우에는 술자리를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내교사라는 딱지 때문에 나의 선택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나의 우유부단함에도 기인했습니다.
학교 주변에 살고 있는 국민학교 동창생들과도
술을 매개로 교류가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동창생들끼리의 만남은 거리낌이 없는 게 보통입니다.
특히 학교 주변 마을에 사는 동창생들은 거의 8년여 만에 만난 친구들이었으며,
대부분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퇴근길에 약속이 됐든 우연이든 동창생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막걸리를 곁들이게 되었습니다.
텁텁한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마지막 술독의 바닥을 확인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늦어서야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막걸리 문화에 젖은 초임학교에서의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술자리를 통해서 정열과 도전의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젊은이들도 있다지만,
배우자마자 젖어든 나의 소비적이고 안일한 막걸리 문화는
한동안 나를 나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나는 '평생 마실 음주량을 젊었을 때 거의 채웠기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마실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용어지만 이름 하여 '주량총량제'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습니다.
실은 술과 관계되는 내부 기관에 노란불이 들어와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인들이 그 사실을 쉽사리 공감하려들지 않으니,
이것이 걸림돌 중의 하나입니다.
어쨌든 막걸리 잔을 주고받으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옛 시절이 가끔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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