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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전반기

풍금과 빠이롱

         풍금과 빠이롱


  교단 초임 시절에 내 또래의 조 선생이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조 선생에 첫 인상에 매우 호감이 갔을 뿐 아니라, 나와 같은 6학년을 담임하게 되어 기분이 썩 좋았습니다.

  같은 해에 교직 생활을 시작한데다 동갑인지라 곧 허물이 터져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교실을 오가며 환경도 함께 꾸미고, 수시로 학급 경영에 대한 정보 교환도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함께 이야기하고 교무실에 갈 때도 같이 내려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에 찬 초임 시절인데 마음 맞는 동료 교사를 만남으로써,

나의 학교생활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둘의 열성은 학교 안은 물론 학교 밖까지도 소문이 나서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평판도 들리게 되니, 우린 이래저래 신바람이 날만도 했습니다.

술 실력도 엇비슷했고 대화가 잘 통했던 우리는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기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학생 교육을 논하고 세상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자전거로 통근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는 40여 분 걸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는 날이면, 집에 가지 못하고 숙직실에서 자는 경우도 가끔 생기게 되었습니다.

술이 얼큰해지면 부모님에게 끼칠 걱정은 저만큼 물러가고, 집에 좀 늦게 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앞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퇴근길에 둘이 막걸리를 몇 잔씩 나누고 일어서보니 날은 이미 저물고,

어느 새 동녘에는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불현듯 조 선생의 빠이롱 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는 걸 포기하고 조 선생을 유인해 다시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끼리는 바이올린보다 빠이롱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감 있게 들린다 하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 선생의 빠이롱 켜는 솜씨를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줄을 타고 흐르는 유행가 가락은 일품이었습니다.

  조 선생이 부임한지 며칠 만에 바이올린을 처음 선보였을 때,

나는 그 물건이 내는 소리에 반해 기회만 있으면 연주를 부탁하곤 했습니다.

 ‘빠이롱’ 선생님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텅 빈 채 적막이 감돌았던 교무실은 나의 풍금 소리와 조 선생이 연주하는 빠이롱의 화음으로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때맞춰 환한 달빛이 간간이 기웃거렸습니다.

보는 이나 듣는 이도 없는 교무실에서 두 사람은 연이어 유행가를 연주하며 노래까지 곁들이느라 신바람이 났습니다.

교무실 안에서 퍼져나가는 유행가의 선율은 운동장에 쏟아지는 달빛과 어울리며,

한동안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그 때 교무실 창밖에서 무엇인가 어른거리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주를 잠시 멈추고 내다보니, 웬 아가씨들이 멀찌감치 도망가서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이려니 생각하며 또 다시 신바람 나는 연주와 노래를 이어갔습니다.

  잠시 후에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아가씨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연주를 멈추고 다시 문밖을 내다보는 순간, 그 아가씨들은 조금 전보다 더 잽싸게 운동장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난 후, 아가씨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우리들의 연주도 시들해졌습니다.

  교무실 안팎은 다시 조용해지고 학교는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 창밖에서 기웃거렸던 아가씨들에 대해 제 나름의 해석을 주고받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아가씨들이 마실 다녀오는 길에 우리 연주에 흘려 이 곳에 발길이 닿은 것 같애."

 "요즘 우리 학교 총각 선생님의 인기가 괜찮은 걸 자네도 알지?

  그래서 동네 아가씨들이 이 곳에 들른 것이겠지."

  중천의 밝은 달 아래 학교에는 우리들만 남았습니다. 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이제라도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이제 더 할 일이 없으니 조 선생도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제야 집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습니다.


 깊어 가는 여름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밤이슬 적시는 자갈길 따라

 자전거 한 대가 힘겹게 굴러갑니다.


                                                                                                  ≡ 1970년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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