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단의 추억/*********전반기

모교의 교단에 서다.

 

          모교의 교단에 서다.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열 한 해, 선생이 된지 세 해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공부하던 영원초등학교에 선생이 되어 되돌아오던 날, 나는 흥분과 감회로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교실이 있던 자리에는 새 교실이 들어서 있었으나, 드넓은 운동장은 옛 그대로였습니다.

본관 앞에 떡  버티고 있던 노송들은 아직도 그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있던 자리는 새롭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위로 국민학교 친구들이 오버랩 되어 스쳐갔습니다.

학교의 모습은 물론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달라져 생소한 기분은 어찌할 수 없었으나,

근무하고 싶었던 학교인지라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습니다.

  국민학교 때 계시던 선생님 세 분이 아직도 모교에서 교단을 지키고 계신 것이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한결같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걸 보면 세월이 우리 선생님들을 비켜 가신 것 같았습니다.


  고향이다 보니 출퇴근길에는 낯익은 얼굴들을 많이 만나게 마련이었습니다.

선후배와 마을 어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반갑게 대해주었습니다.

나를 잘 모르는 어른들은 나의 신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문 선생님, 집이 배양구지라는데 춘부장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선생님을 존경하는 어른들의 깍듯한 말투에 스무 살 초반의 나로서는 오히려 당황스러웠습니다.

 "문 완자 식자이십니다."

  내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어른들은 한결같이 의아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내가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나이에 이토록 장성한 아들을 둔 것이 놀랍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어른들은 대부분 아버지를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그 인품이나 활동이 영원면에서는 꽤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마을 일을 비롯하여 면의 일, 농협 일을 오래 동안 보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고 깔끔한 분이셨습니다.

  나의 신상을 확실히 알게 된 어른들은 대뜸 말부터 한 단계 내렸습니다.

 "문 선생, 그럼 자네 아버지와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니 말 놓겠네."

  그 이후부터는 아이들 앞이든 아니든 호칭이 자연스럽게 문 선생님이 아니라 문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지역 어른들이시고 아버지와 잘 아시는 사이이니,'님'자를 뺐다고 해서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선배나 어른들의 눈을 의식하여 언행을 조심스럽게 하느라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친구 분을 대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1500여 명의 학생들과 30여 명의 교직원들로 북적거리는 모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초임 학교에서 3년간의 경험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교육에 맛을 들였기 때문에,

이제 갓 젖 떨어진 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그 무렵 나의 교단 곳곳에는 풋내가 덜 가신 흔적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탄력을 잃지 않은 당찬 정열만은 나의 재산이며 힘이었습니다.


                                                                                                                             ≡ 1971년 ≡

 

' 교단의 추억 > *********전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금과 빠이롱  (0) 2008.12.18
어설픈 열정  (0) 2008.12.13
아찔한 운동회  (0) 2008.12.02
막걸리 문화에 젖어  (0) 2008.11.26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교단 첫날에  (0) 2008.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