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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전반기

도시락 대신 버거운 짐을 지고

           도시락 대신에 버거운 짐을 지고

 

정남초등학교에서 2년째 근무하던 해였습니다.

문교부 지정 급식 연구학교 운영이라는 커다란 과제가 우리 학교에 떨어졌습니다.

 연구학교는 관계 기관의 지정과 예산 지원으로 국가의 교육정책을

학교 교육 과정에 적용하여 그 효과를 검증하는 학교였습니다.

 

특히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는 그 무게나 희소가치가 커

교육청이나 타 학교의 주목을 받는 학교라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나에게 연구주임이라는 막중한 역할까지 주어졌으니,

이는 1년 내내 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일이 되었습니다.

능력과 경험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사코 사양했으나,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 기피할 뿐 아니라 내가 가장 적격이라는 데에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학교에 오기 전에 전라북도 현직연구위원으로 잠시 이름을 올린 것이 고작일 뿐,

체계 있는 연구 활동의 경험조차 없었으니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급식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상황에서

도시락 없는 학교에 근무한다는 개척자적 자부심이 다소나마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첫날부터 커다란 부담을 떠 앉은 채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여의 진통 끝에 '학교급식의 효율화를 위한 여건 개선 방안'이라는 그럴 듯한 주제를 내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국고 지원, 수익자 부담, 자체 부담 등이 급식 재원 마련의 통로였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국고 지원을 줄이고 수익자와 학교 자체 부담을 늘여 가는 것이 당국의 학교 급식 정책이었습니다.

  나는 교육 연구와 학교급식에 관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학급급식은 이제 초창기인지라 관련 자료가 극히 빈약했습니다.

다행히 정남초등학교는 급식 개척기인 최근 3년 동안

학교급식 실험학교로서의 노하우를 쌓아 왔기 때문에 그것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계획서 제출일이 임박해지면서 나는 당시 담임을 맡지 않았던 교무주임한테 우리 반 학생들을 맡긴 채,

숙직실에 처박혀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습니다.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수업이 아닌 일을 하고 있었으니,

나를 두고 주객이 전도되었다 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연구도 연구지만 교사로서 수업의 결손에 따른 죄책감으로 인하여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아이들의 수업과 연구학교 기획 추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개탄해보았지만, 현실의 장벽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선생으로서의 고민을 늘 가슴에 담고 지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연구 계획 수립에 관한 지도를 받기 위해 전라북도 교육연구원에 두어 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담당 연구사는 급식에 대해 생소하고 현장 감각이 무딘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내용보다 계획서의 일반적인 과정이나 방법만 지적할 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1학기의 끝 무렵이 되면서 우리 학교는 점차 급식 연구학교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교직원과 아이들이 직접 가꾼 배추를 비롯한 무, 고추, 가지, 호박, 파 등이 실습지를 꽉 채웠습니다.

양계장에는 수백 마리의 닭들이 모이를 쪼느라 분주했습니다. 탱탱하게 살을 찌운 돼지들로 인해 양돈장은 비좁아 보였습니다.

이들은 급식 시 부식으로 아이들의 식탁에 오르거나 판매하여 급식의 재원으로 쓰였습니다.

급식소에서는 거대한 제빵기가 몸을 달군 채 아이들에게 급식할 빵을 매일 구워내고 있었습니다.

  주식인 빵과 부식인 국 그리고 보조식인 우유를 기본 식단으로 하되, 요일에 따라 색다른 식단이 제공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번갈아 제공되는 닭고기와 돼지고기도

특별한 식단 중의 하나였습니다. 비록 비좁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급식이었지만,

아이들은 매일 한 끼씩 변화 있는 영양식단을 체험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도시락이 없는 학교는 몇 년 전만해도 꿈같은 이야기였으나, 우리학교에서 그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학교급식은 학부모들의 도시락 걱정을 덜어주며 학교생활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정책이었으며,

그 중심에서 우리 학교가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직원들은 작은 농촌 학교로서 전국적인 규모의 연구학교를 운영한다는 자부심으로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급식에 관한 각종 자료를 만들고, 교실 안팎을 꾸미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연구학교 운영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나는 연구학교 운영에 관한 마지막 지도를 받기 위해 교장 선생님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문교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연구 보고서 초안 하나 달랑 들고 나선 나는, 정부종합청사의 위압적인 모습에 절로 기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지도 연구사의 고향이 같은 정읍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고향 이야기부터 나누다 보니 격의 없는 자리가 되는 듯 했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그의 냉철하고 세심한 지도조언이 시작되었습니다.

  보고서의 토씨와 띄어쓰기 하나까지 검토하는 그 연구사는 꼼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보고서 내용에서 수정한 흔적을 보고는 그 배경을 묻기에,

전북교육연구원에 근무하는 담당 연구사의 의견에 따라 고쳤노라고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문교부 연구사는 지방 연구사의 생각에 문제가 있으니 마치 따져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 연구사 이름을 물었습니다.

문제가 된 내용도 내용이지만, 하급 기관을 경시하는 듯한 말투에 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 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끝에 드디어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농촌의 작은 학교는 문교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백여 명의 참관자들과 차량들로 아침부터 북적거렸습니다.

학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손님들을 맞이한 교직원들과 도우미 학부모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온갖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연구 보고회는 긴장 속에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연구 결과는 슬라이드와 사전 녹음을 이용하여 보고되었기 때문에,

연구주임인 내가 할 일은 끝 부분에 가서 질의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질의 내용 중에 급식을 통해 아이들의 영양 상태나 체격이

연구 전에 비해 얼마나 좋아졌느냐는 예민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사실 1년 동안의 연구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건강이나 영양 상태에 대한 변화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의 관찰과 조사 결과를 토대로 아이들의 영양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습니다.

급식을 통해 농촌 아이들의 영양을 개선한다는 급식 당국의 정책적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지라,

나의 답변은 나중에 임석관들 사이에 다소의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손님들을 배웅한 교직원들은 서로를 칭찬하며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텅 빈 운동장은 공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래도록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나른함이 온몸에 밀려왔습니다.

  어찌 되었든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 연구주임이라는 나의 첫 경험은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

훗날 학교급식이 제자리를 잡는 날까지, 나의 역할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함께…… .


                                                                                                         ≡ 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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