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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자작수필방

(자작수필)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들

(자작수필/2014.8.7)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들

 

  비 오는 날에는 온전히 집안일에 몰두할 수 있어 좋다. 햇빛 속에서 허둥대던 바깥일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나를 내맡겼던 거리의 혼잡 속에서도 벗어났다. 안에다 주저앉히기에 딱 좋은 날이다. 비가 하늘을 가려 방 안은 어두침침하지만 그리 싫지는 않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어느새 그 시절 고향 마을로 달음질치고 있었다. 빗소리에 어스름한 기운까지 감돌며 내 안의 감성을 건드렸다. 비 오는 날 가끔 일어나는 현상이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허상(虛像)만 붙들고 있을 일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 앉으니 서상에 꽂혀있는 낡은 사진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 묵은 사진 정리는 진즉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사진첩을 모조리 꺼내 방바닥에 쌓아놓았다. 세상을 떠난 뒤에 남은 가족들에게 거추장스러운 물건중 하나가 남겨둔 사진이란다. 지인의 이 말이 확신으로 자리 잡은 지 꽤 되었다. 귀한 가보(家寶)도 아닐 진데, 자녀들이 아버지의 이런저런 사진들을 어찌하겠는가.

 오랜만에 펼쳐본 사진첩 속에서는 무수한 과거의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아두면 짐이 되겠거니 하면서도 없애자니 아까워 쌓아둔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진들이 부담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금방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듯 깡그리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선별 작업에 들어갔다.

 내 나름대로 의미와 무의미를 부여하며 버릴 것과 챙길 것을 구분했다. 나만의 분류 기준은 두었다. 완전히 없애야 할 것, 개인 블로그나 컴퓨터 사진 파일에 이동시킬 것. 원래의 모습대로 남겨둘 것 등으로 나누었다. 사진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내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사진은 단순한 종이쪽지가 아닐 텐데, 단박에 퇴출 길로 내몰다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능한 한 미련 없이 없애자는 초심을 독하게 붙잡아 두었다. 때로는 무자비하게 때로는 애통한 심정으로 찢어 휴지통 속에 밀어 넣었다. 요리조리 구분 지을 때마다 무던히도 많은 일들이 스쳐갔다. 어린 시절, 총각 선생 때, 결혼식 모습, 가족, 동료와 제자, 친구들……. 사진을 넘길 때마다 그 시절의 정겨운 이야기들이 말을 거는 것 같다.

 가장 오래 전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졸업사진이다. 하나같이 까만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무표정하게 줄지어 서있다. 거무스레한 옥수수 알갱이들이 빼곡히 박혀있는 모습 같다. 쪼끄만 녀석이 키 큰 아이들 틈에 끼어 있다. 눈을 반쯤 감은 나였다. 배시시 웃음 지으며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봤다. 그 모습이 이렇게 변하다니 허망한 기분이다. 55년 전의 사진과 지금의 내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이 또한 덧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한동안 그렇게 했다. 가을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사진 말고는 어릴 적 내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지 않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졸업사진에 대한 퇴출 통보는 보류해둘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사진은 없애버리자는 내 결심은, 유일하다는 핑계에 밀려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시절의 어머니 모습이 사뭇 낯설다. 외가 식구들과 함께 찍은 걸 보니 집안 행사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역시 귀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어머니의 가장 젊은 시절이다. 사진 위로 어머니의 고달픈 모습이 겹쳐왔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밭뙈기에 나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호미와 머릿수건을 마루 구석에 내버려둔 채 편안해 보였다. 오랜만에 목침을 베고 방바닥에 등을 붙인 아버지도 한가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비 오는 날의 여유로움이랄까. 오랜만에 밭일을 놓았으니 늘어지게 쉴 법도 한데, 어머니는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몸을 그냥 두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나가더니 호박 한 덩이를 따왔다. 잠시 후 온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비 오는 날 굴풋한 배를 채우는 데는 호박 부침개만 한 것이 없었다. 불현듯 부침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고소한 냄새의 출처는 어머니의 사진이다. 건넛마을 아파트에 사시는 어머니는 지금 뭘 하고 계실까. 사진 정리가 대충 끝나면 호박 부침개를 부탁해볼 일이다.

 사진 몇 장을 더 넘기니 넓은 체육관 바닥에서 등이 꾸부정한 아버지가 붓을 들고 앉아 있다. 전국서예백일장대회에서 글씨를 겨루고 있는 모습이다. 여윈 모습의 굽은 등에 눈길이 닿으니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합판과 각목을 뚝딱거려 만든 서예탁자에서 닦은 솜씨로 이날 큰상을 탔다. 아버지께 번듯한 탁자 하나 마련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또 가슴이 저려온다. 후회가 막심하다. 몇 장 안 되는 부모님 사진 앞에서 멈칫거리다 보니, 사진에 대한 퇴출 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그런 중에도 사진첩의 반쯤은 비워졌다.

 휴지통에는 사진의 잔해들이 꽉 들어찼다. 과거의 잔상(殘像)들이다. 들뜬 기분으로 찍었던 사진들이었건만, 시간이 갈수록 의미는 쇠퇴하고 결국은 퇴출당하기에 이르렀다. 친구나 직장 동료와 찍은 사진들은 거의 다 내쳤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느 사진인들 의미가 없을까마는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진첩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미련 없이 정리하겠다는 초심에는 이르지 못했다. 아직도 버린 양만큼 남아있다. 대부분 나와 가족의 사진들이 살아남았다.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시원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산란한 건 왜일까. 사진과 함께 추억의 실마리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리라. 모조리 버리기에는 아직 기억해둘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나마 남겨둔 사진들이 있어 다행이다. 남은 사진들이 힘들었던 시절의 인고(忍苦)와 그 뒤의 기쁨을 기억해주리라. (201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