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즘 이야기★/***자작수필방

(자작수필) 마음의 이목(耳目)

(자작수필/2014.6.25)

 

                          마음의 이목(耳目)

 

       

 

  

   눈앞의 호수가 시원스럽다. 둑을 따라 산책로가 나있고 길가엔 수양버들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듯 물을 적시고 있다. 호숫가엔 듬성듬성 풀 더미들이 조그만 섬처럼 얹혀있다. 왜가리 한 쌍이 한가로이 물 위를 날아다니다 이곳에서 번갈아가며 날개를 접는다. 고개를 쳐드니 멀지 않은 곳에 야트막한 산이 둘러 있다. 평화로운 정경에 마음이 절로 느긋해진다. K선배의 집을 중심으로 본다면 주변의 풍광은 그만의 너른 정원이나 다름없다.

  K선배의 농장으로 초청받은 날, 그의 여유로운 마음씀씀이와 아름다운 시의 원천이 집 주변의 자연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거기에 울안의 텃밭에는 갖은 채소가 널려있으니 살맛이 나겠다. 보따리 하나 챙겨들고 곁방살이라도 청해보는 무례를 범하고 싶어졌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니 무넘이를 넘어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끄럽다. 주변의 아늑한 정경을 시샘하는 아우성 같다. 호수에서 숨을 고르던 물이, 강줄기로 나아가 힘을 쓰려면 여기에서 한 차례 곤두박질쳐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런 다음 몸을 추스르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리라. 이렇듯 강물이 통과의례(通過儀禮)를 치루는 무넘이는 선배의 서재에서 지척이었다. 내겐 소음처럼 들리는 이 소리를 매일 듣는다니 선배는 정신이 산란할 것 같았다. 그게 걱정이 되어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시끄럽지 않나요?”

  내 물음에 대한 반응이 걸작이었다.

  “난 좋기만 한데 뭘. 아침이면 물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창문이 호수 쪽을 향해 빵긋 열려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처음 하는 일이 창문을 조금 열어놓는 것이란다. 주먹 하나 드나들 정도만큼만 열어놓아야 가장 아름다운 물의 소리가 들어온단다. 이른 아침에 무넘이를 넘어 떨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면 시상(詩想)이 절로 솟는다나. 내가 듣기엔 물소리가 주변의 정경에 옥에 티가 될 성싶은데, 선배는 그걸 또 하나의 옥(玉)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해놓고 본전도 못 찾는다더니 내가 그랬다. 감성을 부르는 소리를 소음처럼 생각했으니 무렴한 일이었다. 나의 단순한 속내에 비해 그는 너무도 태연하고 진지했다. 물소리 너머의 또 다른 소리까지를 듣지 못한 나 자신의 녹슨 감수성을 손보는 일이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사물을 눈 여겨 보고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현장학습 한번 제대로 한 셈이었다.

  그때 일이 학습이 되어서인가. 집에 돌아와서 그 장면을 생각하니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올랐다. 어느 부부가 달구경을 나갔다. 아내가 달도 참 밝다 하니까 남편이 보름달이니 밝겠지 했다던가. 한껏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던 아내는 남편의 무심한 반응 때문에 삐져서 돌아섰단다. 사물을 보는 남편의 눈이 영 딴판이었기 때문에 그날 아내의 기분은 상했을 게 뻔하다.

  사랑을 키우던 요즘 젊은 남녀 사이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그거 하나 딱딱 못 맞추느냐며 핀잔을 했던지, 상대방의 메마른 감수성에 실망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들리는 소리만 듣고 보이는 것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고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수박의 겉만 핥는다면 그 달콤함 맛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이처럼 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느낌이 다른 건 아마 마음의 눈이 있어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소리를 다르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귀 때문이 아닐까. 눈에 심안(心眼)이 있다면 귀에는 심의(心耳)가 있을 법하다. 눈과 귀뿐만 아니라 코, 혀, 피부 등 오관(五觀)이 다 그러할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매사 서두르는데다 생각이 짧아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곤 했다. 시야는 좁고 귀는 무뎠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잠들어 있던 마음의 이목(耳目)을 조금씩 깨우게 되어 다행이다. 늦게나마 눈과 귀가 조금은 트여가는 것 같다. 보이는 것 뒤에 숨겨진 것을 볼 줄 알게 되고, 들리는 소리 너머 또 다른 소리를 조금이나마 듣게 되었다. 이는 모두 수필쓰기의 덕분이 아닌가 싶다. 글을 쓰려면 우선 자연이나 사물을 보는 이목을 키우고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매양 대하는 것일지라도 애정을 갖고 보면 달리 보이거나 들린다 하지 않는가.

  별이 빛나는 소리를 듣고, 꽃잎이 열리는 소리를 알아차리려면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할 것이다. 봄이면 나무에 물오르는 기척, 여름이면 숲속에서 생명들이 커가는 소리, 가을이면 오곡백과에 살이 오르고, 겨울이면 나무들이 내공을 키우는 소리 등…….이들을 무슨 재주로 보고 듣겠는가. 마음의 눈과 귀 아니고는 가당치 않을 성싶다. 새로운 것을 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19살에 눈과 귀와 말을 잃고도 미국의 시계적인 사회복지 사업가로 성장한 헬렌켈러가 숲 속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단다. 그런데 별거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한 시간 동안이나 숲 속 을 거닐었는데 특별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다니, 어찌 그럴 수 있을까?’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멀쩡한 눈과 귀를 가지고도 본 것이 없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던가 보다. 생각이 없으니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릴 리가 없었던 것이리라.

  나도 ‘보름달이니 밝지’‘하는 따위의 무덤덤한 반응으로 남들로부터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책망을 들어서는 안 되겠지 싶다. 제대로 보거나 들으려면 눈과 귀의 생리적 역할에만 기대하지 말고 마음을 실어야 할 것 같다.

  마침 어머니께서 김치 담아놓았으니 가져가라는 전화가 왔다. 김치가 문제가 아니라 아들 내외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신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 정도면 내 마음의 귀도 조금씩 열리는 것 아닐까. (2014.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