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2014.8.18.)
여름에 대한 변호(辯護)
엊그제까지만 해도 구박의 대상이었던 여름이 곧 떠나려는가 보다. 타오르던 여름이 갈 채비를 하고 있다는 증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느낌이 미세하게나마 다름을 느낀다. 기세등등했던 무더위도 수그러들고 중천의 햇볕 아래서도 견딜 만해졌다. 며칠 전만 해도 얇은 덮개조차 거추장스러웠던 잠자리였다. 이젠 몸을 오그리며 잠결에도 이불을 끌어당기게 된다. 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간사해지는 나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얼마나 미워했던 여름인가. 이마의 땀을 훑으며 원수 같은 여름아 어서 가라며 타박했다. 종일 뜨거운 열기를 퍼붓던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여름은 내 머리를 멍하게 주저앉혀 생각조차 일단 멈춤으로 몰아갔다. 때로는 한밤중까지 들볶았으니 누군들 여름을 곱게 보겠는가.
계절에 대한 사람들의 감성은 어떤가.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을 찬미하고, 결실의 가을을 예찬한다. 그리고 겨울의 설경에 탄성을 지른다. 그에 비하면 여름에 대한 칭찬은 인색하기만 하다. 평가절하의 계절로 밀리기 십상이다. 마치 피서가 여름과 동의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며 피하려고만 든다.
여름이 지겨워서일까. 계절이 바뀌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발 빠르게 가을에 대한 찬사에 입이 마른다. 여름에 대해 무심했던 사람들이 가을을 환영하는 깃발이라도 들고 거리에 나설 기세다. 여름이 언제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 마음이 싹 바뀐다. 가을 세간을 미리 대문 앞에 수북이 쌓아놓고 기다리는 꼴이다. 아직 여름이 짐을 싸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사람처럼 간사한 존재가 없다 하더니만 계절에 대한 민감성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유독 여름만은 어서 지나가기를 바란다. 더위는 이기거나 피해야 할 대상일 뿐, 여름이 이루어 놓은 일들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여름과 더불어 즐기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계절의 속성을 알아차린 사람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뜨거운 햇볕으로 기온을 끌어올리고 땅을 덥혀주는 것이 여름의 제 모습이다. 봄처럼 꽃피우고 가을같이 익으려만 한다면 그게 무슨 여름이겠는가. 만물의 키를 높이고 살을 찌우는 일은 여름만의 성스러운 작업이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청춘의 계절인가. 사람에게도 뜨거운 청춘이 있기에 노년의 은빛이 아름다운 것 아닌가.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속담이 있다. 여름날 하루의 가치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할 일이다.
세상만사 존재 이유가 있다지 않는가. 콘크리트 틈새의 잡초도 자신의 존재를 의연하게 지키며 그 자리가 최선인 양 몸집을 불리고 풀꽃을 피운다. 여름 없이 가을의 풍성함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 여름의 존재가 무겁지 않겠는가. 여름의 햇볕과 무더위를 흠뻑 받아야 산천초목에 살이 오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렇지 않고는 가을의 튼실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여름이라는 축적과 인고의 세월이 있기에 우리는 결실 앞에서 웃을 수 있다.
생명체가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한살이를 마감하는 것은 계절의 흐름에 따른다. 때가 되면 여름은 떠나고 그 자리에 가을이 여물 채비를 하고 들어설 것이다. 자연의 흐름이나 세상일은 이치와 순리를 따른다. 일단 자리를 비워주어야 들어올 것 아닌가. 고추를 거두고 수명을 다한 고춧대가 터를 비워주어야 비로소 가을 채소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여름도 정리와 성찰을 마쳐야 비로소 떠날 것이니, 들어올 가을은 너무 서둘지 말고 기다려야 할 성싶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여름의 편에 서 있다. 힘 빠진 여름의 뒤태를 보며 애틋함으로 서성인다. 여름이 마치 계절의 이단아라도 되는 듯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되묻고 있다. 자연의 흐름에 충실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따름인데 말이다. 그동안 여름을 향한 내 생각과 행동은 참으로 가소로웠다. 여름에 퍼부었던 푸대접은 되지 못한 불평에 불과한 것이었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너무 심하게 대하지 않았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운 정이 발동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토록 구박할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뜨거워서 아름다운 여름, 무더워서 고마운 계절이라 말해주고 싶다. 끝자락이 떠나기 전에 여름에 감사하고 찬미할 일이다.
“여름아, 미안해.”
(20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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