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2014.5.14)
변함없으시네요
문경근
직접 만나는 것도 아니고 통화인데도 설렘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45년 만의 연락이 어디 흔한 일인가. 처음에 무슨 말을 건넬까. 목소리는 어떨까. 모습은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며칠 전, 신문에서 J가 대표로 있는 단체에 관한 기사를 우연히 읽고 서울 사무실로 연락을 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친구 J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첫 마디는 “자네 목소리 변함없네.”였다. 45년 전의 목소리를 기억하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함없는 목소리가 잠깐 사이에 우리를 젊은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하얗게 변했을 그의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을 상상해볼수록 오히려 그와의 옛날 일들이 뚜렷해졌다.
1968년 3월, 새내기 선생이 된 J와 나는 벽지 학교의 같은 학년 이웃 교실에서 만났다. 총각에 나이도 같다 보니 우린 금세 가까워졌다. 녹록지 않은 초임 시절에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퇴근길에 막걸리라도 몇 잔 나누게 되면, 다시 교무실로 들어와 흥을 이어가기도 했다. 창 밖에서 달빛이 우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고 나는 풍금을 치며 밤늦도록 노래를 불렀다. ‘섬마을 선생님’은 우리의 단골 주제가였다. 그의 노랫소리는 굵직하면서도 맑았다. 바로 그 목소리를 지금 듣고 있다니, 젊음이 다시 온 듯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는 마주 보며 그동안 변한 모습을 확인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엇이 그와 나를 단번에 옛날로 돌려놓았을까. 그 시작은 아마 ‘변함없다.’는 짧은 말 한 마디가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어가니 듣기 좋은 말도 달라진 것 같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을 때, 반색하며 주고받는 ‘변함없다.’는 말이 그중 하나다. 인사치레 말이라도 그렇다. 그러나 만나기가 무섭게 그동안 몰라보게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리 반갑지가 않다. 젊은이도 아닌데 변했다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하지 않은가. 열에 아홉은 늙어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도 나이 든 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특히 변했다고 말하는 대상이 마음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이 몹시 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 든 이에게는 더 그럴 수도 있다. 마음이 변했다는 것은 사람이 변했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현일 테니 말이다. 내가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 앞에서 많이 변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은 예전에 가까이 지냈던 사람도 모임이 아니면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이 우연한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곳에선 뜻밖에 오랜만의 만남이 이루어져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일도 가끔 생긴다. 여기에서도 ‘변함없으시네요.’라는 인사말을 들으면,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그 순간만이라도 기분이 좋으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남을 좋게 보아주고 좋은 말로 표현해주는 것은 상대방도 즐겁고 나도 기쁜 일이 아닌가 싶다.
후배나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선생님, 변함없으시네요.’라는 인사말을 듣게 된다. 내가 이 말을 좋아하는 줄 아는지, ‘선생님, 예전과 똑같아요.’ 하며 한 마디 덧붙이기도 한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인 줄 짐작하지만 기분은 괜찮다. 자주 만나는 나이 든 또래끼리는 듣기 어려운 인사말이니 더 그렇다. 변해야 산다고 외치는 요즘 세상에서도 변함이 없다는 말이 듣기 좋으니 웬일인가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드는데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주름은 늘고 행동도 느슨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월 따라 알게 모르게 변하는 게 사람일진대, 누가 이 순리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변함없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거울을 보며 실망할 일도 아니다. 잠시 착각에 빠져도 무방하다. 좀 더디게 변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에 적응하려면 스스로 변해야 산다고들 한다. 변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영 낙오자가 될 것이라며 변화를 역설하는 소리도 들린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아내와 자식 빼고는 모두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과장된 표현으로 변화를 강조한 말이겠지만, 생존경쟁에 내몰린 기업으로서는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변한다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세상엔 변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세태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조차 몽땅 변해버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굳건히 지켜내야 할 무엇이 있어야만, 변화도 제값을 할 것 아닌가. 경쟁적으로 바뀌고 달라지는 것만을 추구하는 때일수록 변함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싶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그 대상이 겉모습이든 마음씨든 변했다는 말보다 변함이 없다는 말을 더 좋은 뜻으로 받아들인다. 요즘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도 은근히 듣고 싶어진다. 예전에도 마음 씀씀이가 괜찮게 보였는데 지금도 그러하다면, 변했다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은 말이 아닌가. 이 정도면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닐까 싶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45년만의 통화에서 내 목소리가 변함없다고 말해준 J가 솔깃이 생각난다. 서둘러 만나봐야 할 일이다. 마주보면서 달라진 모습을 확인하고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변함없는 것들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2014.5.14.)
'★요즘 이야기★ > ***자작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수필) 전북일보 '금요수필' 게재 (0) | 2014.06.27 |
---|---|
(자작수필) 마음의 이목(耳目) (0) | 2014.06.25 |
(자작수필) 잔정 (0) | 2014.05.03 |
(자작 수필) 연둣빛 신록에 젖어 (0) | 2014.04.28 |
(자작수필) 학교 다녀온 뒤 (0) | 2014.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