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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자작수필방

(자작수필) 잔정

 

 (자작수필2014.5.2)

 

                                잔정

           

  매주 수요일 309호 수필반 강의실에 들어선 문우들은 아침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겨우 일주일만인데도 그리 반가운지,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이날도 수업 시작 전의 강의실 풍경은 그랬다. 그런데 만경강 시인 K 문우가 보이지 않았다.

  농장에서 봄 작물들과 몸을 부비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는 길이 멀어서일까. 모두 궁금하던 차에 K 대신, 그가 보낸 두릅이 담긴 큼직한 봉지가 강의실에 도착했다. 가시오가피 순도 한 봉지 따라왔다. 본인이 올 수가 없게 되어 택시에 실려 보냈단다. 바쁘다 보면 지나칠 성도 싶은데, K는 그렇지 않았다.

  궁금한 문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마치 봉지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를 들이댔다. 봉지 안을 뒤적이니 나무두릅이 아직도 숨을 쉬며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만경강 언저리의 봄이 묻어온 두릅이 풋풋한 내음을 풀풀 풍겼다. 입안에서는 벌써 쌉쌀한 맛이 감돌았다. K의 수더분한 잔정까지 얹힌 두릅 때문에 강의실은 금세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두릅 중에도 나무두릅의 새순은 그 맛이 최고라 하지 않는가. 그 특별한 것을 눈앞에 두고 누군들 입맛을 다시지 않겠는가. 두릅은 살짝 데쳐서 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향긋하면서도 쌉쌀한 맛은 입과 코를 한꺼번에 즐겁게 한다. 단백질과 비타민, 면역에 좋다는 사포닌까지 품고 있다니 인기 상종가(上終價)다. 가히 봄 산채의 제왕이라 불릴 만하다. 특히 두릅 순에서 나는 독특한 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단다. 수필을 쓰는 사람에겐 안성맞춤일 성싶다.

  그런 두릅이 지금 우리 앞에 있었다. 싱싱한 채로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 K 문우는 이른 아침부터 두릅나무 가시에 할퀴며 밭두렁을 더듬었을 것이다. 진즉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K의 잔정이 오롯이 느껴졌다. K는 수필반 문우 중 유일한 농사꾼 시인이다. 만경강 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농장은 그의 삶의 터전이자, 글의 발원지가 아닌가 싶다. 그가 쓴 시나 수필을 읽어보면 짐작이 가는 일이다.

  두릅 때문에 이날 강의는 집중력이 조금은 떨어진 듯했다. 강의는 다음 주에도 있지만, 두릅은 오늘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하니 그럴 법도 했다. 영리한 문우 둘은 두릅 보따리를 들고 점심 예약이 된 식당으로 미리 갔다. 두릅의 양이 만만치 않으니, 그걸 다듬고 씻으려면 시간이 걸릴 걸 생각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마음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던 문우 아니던가. 이 같은 상황에서 강의 좀 빼먹은들 교수님인들 뭐라 하시겠는가. 교수님도 마음의 반은 무공해 청정 두릅에 가 있을 테니까.

  식당에 들어서자, 주방 옆에 수북이 쌓인 두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음식이라는 게 어느 정도 기다리면서 감질이 나야 젓가락 놀림이 빨라지는 법. 이를 아는 듯 한참 뒤에야 밥상 위에 두릅이 올라왔다. 하얀 접시에 놓인 두릅의 자태에 17명 문우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꽂혔다.

  이날 미리 주문해둔 점심 메뉴는 콩나물국밥이었다. 그러나 콩나물국밥은 주인 자리를 두릅에 물려주고 뒷전으로 물러났다. 두릅은 귀한 몸 대접받듯 밥상 한가운데 놓였다. 전주 음식의 명성이 잠시 밀리는 모습이다. 하기야 두릅 순 모양이 언뜻 보면 왕관을 닮기는 했다.

  문우들 입안으로 두릅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봄도 따라 들어갔다. 한동안 두릅 삼매경을 즐긴 뒤에야 찬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필도 식후경(食後景)이며, 수필가도 먹어야 문장이 나오는가 보다. 그러나 귀가 번쩍 뜨이는 수필다운 반응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선 먹기가 바빴을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밥상머리에서까지 수필을 논하는 것은 제왕 두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한참 두릅을 먹던 회장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선배님, 지금 두릅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K 문우와의 통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특별한 밥상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중계했다. 두릅에 취해있는 와중에도 역시 K를 챙기는 건 회장이었다. 두릅의 바닥을 확인한 문우들은, 뒤따라 올라온 가시오가피 순 부침개로 젓가락을 옮겼다. 쓴맛이 입 안을 한 바퀴 휘젓더니, 목 안으로 사라졌다. 뒷맛이 깔끔해서 좋았다.

K가 두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수필반 봄철 문학기행 때이니 3주도 지난 일이다. 농장 주변에 두릅나무가 있는데, 좀 더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문우들에게 두릅 맛을 보이겠다는 약속이었던가 보다.

  그의 잔정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동안 맛보기로 강의실로 가져온 농작물이 한둘이 아니다. 가진 것이 있다 한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무심할 정도로 잔정이 없는 나는 언제쯤 거기에 미칠 것인가. 자상하고 세세하게 베푸는 그의 잔정이 부럽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푸짐한 봄맛을 보내온 K의 잔정 덕분에 귀가하는 발길이 가뿐했다. K가 쓴 시?호수의 봄?한 구절을 떠올리니, 그가 사는 마을과 어우리 호수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어로(魚路) 무너미는 목소리가 커졌고

 떨어지는 물은 놀라 흰색으로 변했다

 호수의 봄은 실바람을 타고

 이슬비에 젖어

 오지 말래도

 제 발로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