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2014.4.20)
연둣빛 신록에 젖어
매년 5월 초면 만사 제쳐놓고 내장산 숲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연둣빛 신록에 심신을 흠씬 적셔보고자 함이다. 올봄에는 계절이 서둘러 와서인지 봄꽃들도 일찍 피었다. 연둣빛 신록 탐방이라는 나만의 연례행사도 열흘쯤 앞당겨졌다.
초입에서부터 온통 연둣빛이다. 산벚꽃이 한판 벌이고 지나간 자리엔 신록이 자리를 폈다. 내장산의 대명사인 단풍나무 이파리들도 가을 잔치를 위해 첫걸음을 뗐다. 내장산은 온통 풋풋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겨우내 안으로 쌓아온 내공이 서서히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리라. 난 가을 단풍보다 연둣빛 신록을 더 좋아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뭇가지가 내미는 여린 손을 잡으러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차를 타든 걸어가든 내장사로 향하는 길은 적당히 구불구불해서 좋다. 온통 연둣빛으로 치장한 숲길은 시작부터 절로 찬탄이 나온다. 인고의 겨울을 견뎠으니, 이만한 찬사는 들어 마땅하리라. 연둣빛 신록의 모태(母胎)는 얼마 전만 해도 잿빛을 띤 나목(裸木)이었다. 그 두꺼운 껍질을 뚫고 가녀린 손을 내밀다니, 자연의 순리가 경이로울 따름이다. 연약하지만 엄숙한 시작이었다. 나의 신록 탐방은 첫걸음부터 몰입이었다.
내장사로 향하는 찻길 대신 숲 사이로 난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여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이파리들이 앞 다투어 손가락을 내밀어 옷깃을 건들었다. 나를 좀 봐달라는 듯 수줍게 고개를 드는 것도 있었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저마다 여린 몸집을 키우느라 분주했다. 이들의 심장은 아직 여리고 무를 것이다. 계곡의 잘잘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햇빛을 흠씬 쏘이다 보면, 그들도 머지않아 살이 오르리라. 힘을 기르는 몸짓들로 숲 속은 생기가 넘쳤다. 생명의 약동이었다.
잠시 숲을 벗어나는가 싶더니, 널찍한 빈터가 나타났다. 고개를 드니 하늘이 산뜻하게 드러났다. 파란 하늘과 신록의 어울림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마루의 큼직한 바위가 신록 융단을 깔고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다시 신록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숲 속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 나왔나 보다. 쫄랑거리며 걷고 있는 행렬이 연둣빛 숲길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안녕!” 나는 일부러 아이들 말투로 인사말을 건넸다.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연둣빛 숲 속으로 번져갔다.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아이들과 숲을 번갈아 보았다. 연둣빛 신록 속의 아이들, 이 순간 이보다 잘 어울리는 모습이 또 있을까 싶었다. 잠시나마 아이 속에 있어서인지, 거추장스런 것들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갈림길이 가까워지자, 크고 작은 화물차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육중한 장비를 설치하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젊은이는 삼십 여명쯤 되어 보였다. 그들 사이로 잎이 무성한 나무 서너 그루가 풀밭에 누워있었다. 작은 화분들도 늘어져 있었다. 숲 속에 나무가 누워있다니, 묘한 일이다.
가까이 가보니 나무와 화분은 모두 만든 것이었다. 광고 촬영 중이란다. 고개만 돌리면 신록으로 단장한 나무가 지천인데, 나무 모형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광고 만드는 사람들의 속셈을 한가한 산책객이 헤아릴 길이 없듯, 그들 또한 내가 어디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탐방 안내소를 지나니, 108개의 단풍나무가 늘어선 채 나를 맞았다. 연둣빛 신록의 절정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풋풋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상큼한 바람결은 간간이 얼굴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이곳 단풍나무 터널의 신록은, 늦봄과 초여름이 배턴터치 하는 길목에서 벌이는 향연이 아닌가 싶다. 신록이 하늘을 가리니 그늘조차 연둣빛이었다. 간간이 청아한 목탁소리까지 끼어들면, 낙원인 듯 넋을 잃게 된다.
이맘때의 신록은 사람으로 치면 갓난아기부터 유치원 아이쯤이 아닐까. 이만큼 되기까지 봄빛이 끊임없이 매만져 주었을 것이며, 뿌리는 쉼 없이 물기를 올려주었으리라. 사람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자연은 순리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장산 연둣빛 신록에 심신을 적시고 나니, 한결 가뿐하고 개운했다. 연둣빛과 청량한 공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절로 꿈틀거리는 같았다.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할 따름이다. 산에서 나온 뒤에도, 내장산의 연둣빛 신록을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녔다. 한동안은 연둣빛에 흠씬 적신 기운이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었다. (201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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