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2014.3.7.)
요행(僥倖)의 뒷맛
하늘은 찌푸리고 찬바람까지 부는 오후, 선뜻 집을 나서기가 망설여지는 날씨다. 창밖을 바라보니 최근에 개업한 마트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품권 추첨하는 날인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두툼한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집을 나섰다. 마스크에 모자도 푹 눌러 썼다. 남의 눈을 의식한 탓도 있다. 요행을 바라고 나서는 길이라 그런지 많이 가리는 차림새가 되었다.
집을 나설 때는 ‘밑져야 본전이다. 재미삼아 가본다.’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요행이 내 편에 섰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공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모두 요행의 기대에 부푼 표정들이었다. 다른 일에도 이렇게 약속 시각을 잘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추첨 진행자는 경품 내용을 확인해주면서 분위기를 한껏 띄워놓았다. 당첨자 수는 총 300명에 1등 상금이 500만 원이란다. 잠들어 있던 요행 심리가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내 안에 이런 심리가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4년 전에도 요행 덕에 지역 행사에서 자전거를 경품으로 받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첫 번째 경품을 받을 사람이 뽑혔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런 시시한 물건은 그냥 지나쳐도 괜찮다는 표정들이었다.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자는 심산(心算)이었으리라. 나도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아직 나를 기다리는 상품은 수북이 쌓여있고 기회도 많으니 조급할 일이 아니었다.
상위 경품으로 갈수록 긴장감의 수위도 따라서 높아졌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웅성거리는 소리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진행자는 이런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유머를 날리며 사람들을 들었다 놓았다 여유를 부렸다. 추첨권에 적힌 번호가 불릴 때마다 희비의 교차가 뚜렷해졌다. 그날 추첨권에 적힌 번호는 손수 써서 상자에 넣었던 자신의 전화번호였다. 말이 좋아서 행운권이지 요행권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전화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렸다.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미 요행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나도 이 순간만은 요행을 바라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요행을 들킬까 봐 슬그머니 염려되기도 했다. 당첨 여부에 귀를 기울이면서 표정 관리까지 신경 쓰려니 쉽지가 않았다. 당첨번호를 부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을 테니, 요행을 이미 들켜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추첨이 절정에 가까워지자 간간이 부러운 탄성이 터졌다. 때로는 환호성이 들리기도 했다. 알고 보니 당첨자에게 보내는 찬사가 아니라, 당첨된 사람이 현장에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통하고 있었다. 요행을 쫓는 사람들의 속마음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3등 당첨자부터는 현금을 준다는 멘트가 기대 심리에 다시 불을 댕겼다. 지금부터는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며 조건을 붙였다. 이 말을 들은 한 아주머니는 집으로 전화를 걸더니 다짜고짜 빨리 주민증을 가져오라며 소리쳤다. 마치 1등에 당첨이라도 된 듯 흥분된 모습이었다. 나도 슬그머니 지갑을 열고 신분증을 확인해두었다. 당첨을 예약이라도 한 듯 들뜬 몸짓들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나의 요행심도 요동쳤다.
1등 추첨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두어 시간 동안 요행의 담장 안에 갇혀있던 나는, 돌아서는 무리에 섞여 그 자리를 나왔다. 감춰둔 요행을 들켜버린 나는 참으로 가벼운 존재였다. 물건을 사고 덤으로 얻은 경품권에 잠시나마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말이다. 재미삼아 나왔다고 자위해보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당첨이 안 되어서가 아니다. 남이 노력해서 얻는 것을 나는 팔짱만 끼고 가지려 했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도랑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 내 모습들에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만일 1등 당첨으로 5백만 원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 힘들게 번 돈처럼 아껴서 썼을까. 아니다. 자신이 없다. 쉽게 얻었으니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며 펑펑 썼을 것이다. 요행으로 얻은 행운은 일시적이고 뜬구름 같다는 것을 실증이라도 하듯 말이다.
마음 한구석에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요행 심리를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어릴 때에도 운 좋게 길바닥에서 돈이라도 한 푼 주워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그때의 요행은 아이다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다분히 타산적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요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이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마다 요행을 바라는 본능이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다. 요행은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것이려니 싶다. 쉽고 편한 속성이 있어 빠져들기에 십상인 것이 요행인가 보다.
이날 잠시나마 나를 흔들리게 했던 요행의 단맛. 그것은 알고 보니 뱉어야 할 쓴맛이었다. 요행으로 행운을 취했다한들, 땀으로 얻은 보람에 비교될 수 없는 하찮은 속물(俗物)에 불과할 것이다. (20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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