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2014.2.14)
내 삶의 전환점
연약한 애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나뭇가지를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어디까지 갈까 궁금했지만 그놈이 가는 길을 바꿔버리고 싶었다. 심술이 발동한 나는 애벌레를 슬쩍 들어 다른 나무로 옮겨놓았다. 어릴 적 심심풀이로 했던 장난으로 인해 하찮은 미물의 진로가 바뀌었다. 그 애벌레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은 것이리라. 내 삶의 전환점도 그러했다. 내 선택과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내 삶에서 최대의 갈림길이 아니었나 싶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한 해라도 빨리 돈을 버는 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큰아들의 교육을 통해 가난의 멍에를 벗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였다. 진로 결정의 최우선 조건은 당연히 취업이었으며, 나의 진학도 그런 관점에서 정해졌다. 적성이나 꿈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H공업고등학교 일반기계과의 진학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입학 후 서너 달은 막 개교한 새 학교 분위기와 생소한 실습 시설 등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여건들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당시 외국인 강사의 수업은 파격적인 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든 게 장밋빛이었으니, 허니문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최신이라고 소문난 실습실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새로운 기계 기구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도 모른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교과에 대한 나의 취향이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물리 등 이과 시간은 도통 정이 가지 않았다. 반대로 국어와 영어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제야 문과가 내 적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공업학교 학생으로서의 정체성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그림자가 짙어지며 기대도 내리막으로 들어섰다. 혼돈과 갈등의 연속으로 나는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터덜거리는 꼴이었다. 잘못된 선택에 기인한 것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1학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학교의 편제가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바뀐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에서 이런 변화는 뿌리째 바뀌는 대전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전환점이 훗날 내 삶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리라고 꿈엔들 생각했을까. 갑작스러운 소식에 뒤숭숭해진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아 순응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일부 학생들은 전학을 가고 그만큼의 학생들이 새로 들어왔다. 나는 별 고민도 없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당시 집안 형편은 학업을 계속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에 나는 물론 아버지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나의 의지와 선택에 관계없이 다른 신발로 갈아 신은 셈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교육과정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운영되었다. 나의 적응은 뜻밖에 순조로웠다. 내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문과적 기질도 탄력을 받아 공부에 맛을 붙이게 되었다. 나에게 맞지 않던 신발을 벗어버리니 심신이 홀가분했다. 어두웠던 터널의 출구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교육대학에 진학하고 곧바로 선생이 되었다. 그 뒤로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42년을 교단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뜻밖의 전환점이 내 삶을 통째로 바꿔놓은 것이다.
요즘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 편제를 계속 유지했더라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중도에 학교를 포기했던지 아니면 겨우 졸업해서 어설픈 기술자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기계를 다룬다든지 몸으로 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나를 생각하면 아찔하기조차 하다. 내 적성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몇 차례의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전환점은 스스로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 주어지기도 한다. 앞으로 남은 내 삶에도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것은 웃는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고, 실패나 좌절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바로 일어설 기회라 하지 않았는가. 만일 나에게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나를 그대로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나를 조정하고 이끌어 갈 생각이다. 전환점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만의 멋진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
요즘 나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암시하는 징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필이 바로 그것이다. 썩 괜찮아 보여 매달려볼까 한다. 이걸 꽉 붙잡아 내 삶의 마지막 전환점으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소재도 찾아보고, 추억 창고도 뒤적이고 있다. 생각도 가다듬고 깊이도 더해야 한다.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201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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