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 2014.1.26.)
사람이 그러면 못 쓰는 거여
나는 길게 말하는 데는 도통 재주가 없다. 그래서인지 조리 있고 긴말로 좌중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감칠맛 나고 유머까지 섞이면 금상첨화다. 그렇다고 항상 그러는 건 아니다. 논두렁이 터질 듯 농사가 잘된 줄 알았는데 막상 거두어보니 온통 쭉정이일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긴말도 긴말 나름이 아닌가 싶다. 그런가하면 짧은 한 마디인데도 오래토록 마음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성현의 명언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예전에 같은 마을에 살던 어르신 이야기다. 입은 무겁고 가방끈은 짧았지만 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무거운 입을 열어 한 마디씩 던지면 짧지만 속 깊은 말이 되었다. 마을에서도 쓸 말만 한다고 정평이 나있었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술에 취해 주사(酒邪)를 부리는 사람은 어김없이 그의 한 마디 경고를 들어야 했다. 거짓부렁 하는 아이들도 그의 꾸지람엔 고개를 숙였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나타나면 입을 주목해야 했다.
그가 가장 애용하는 한 마디는 ‘사람이 그러면 못 쓰는 거여.’였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요즘에 와서 되새겨 보면, 큰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말은 명언 사전에도 안 나온다. 화려한 수사(修辭)나 자상한 설명이 없었는데도 그 말이 생각난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짧지만 얼마나 의미 깊은 말인가. 아마 그의 삶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이야기라 그런 것 같다. 찬찬히 곱씹어보면 그의 한 마디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사람 노릇’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 노릇을 하며,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원초적 질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람 노릇을 못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치자. 아마 이 말처럼 치명적인 평판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사람 노릇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하며 살고 있으니 그리 부끄러운 삶은 아니라며 자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사람 노릇 하면서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아 얼버무리거나 궁색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 노릇이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기본적인 노릇인 줄 알면서도 대답하기 쉽지 않다.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 것 같다며 푸념하는 소리도 들린다.
조선 중기의 문인 성여신은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면 집이 광채가 나고,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면 집이 잡초로 덮인다.’라는 말로 아들을 훈계했다 한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맡은 바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해독을 끼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람 노릇은 어느 정도일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에 태어난 이래 자의든 타의든 여러 가지 역할을 부여받으며 지내왔다. 그중에서도 자식 노릇,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어른 노릇, 선생 노릇 등을 가장 크고 무거운 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느 노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자식으로서 모름지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거늘 그러지 못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결혼을 통해서 주어진 남편 노릇 역시 부끄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식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정성껏 뒷바라지하는 아버지 노릇 또한 한참 미치지 못한다. 어른 노릇 역시 본을 보이기보다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 선생 노릇을 나의 천직으로 삼으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지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보다 머릿속만 채우려 했던 것 같아 후회된다. 부끄럽지만 나의 사람 노릇은 아직도 어정쩡한 상태다.
날마다 쏟아내는 새로운 물건들로 인해 생활은 윤택해지고 먹을거리도 많아졌다. 그러나 사람 사는 맛이 예전 같지 않아 어딘가 허전하다. 인정은 메말라 가는데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라고들 한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을 하며, 사람 노릇 못한 것을 변명하기도 한다.
요즘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처에 상처를 내며 갈 길을 막고 있다. 개인적인 갈등은 인간관계를 흐트러지게도 한다.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배타적 이기심을 그 원인으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종종 망각하고 산다. 그렇다고 남이나 세태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뒷짐 손을 가슴으로 옮겨 나 자신의 '노릇'부터 살펴봐야겠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사는 동안 결코 이룰 수 없는 명제일까. 오늘도 촌로(村老)의 짧은 한 마디가 나를 향해 꾸짖는다. 세상을 향해 매섭게 질책한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쓰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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