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送年)의 숨고르기
- 한 해를 보내며 -
한 해의 끝자락이 머뭇거리고 있다. 마지막 구겨진 달력 한 장이 가는 해를 붙들고 있지만 어쩐지 힘겨워 보인다. 내 책상 위에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내년 달력은 한 달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인수인계를 하는 데도 최소한의 기간이나 구역이 있으면 어떨까 싶다. 계주경기에도 배턴존이 있다. 배턴을 넘겨주고 넘겨받기 위해 정한 구역인데, 이걸 지키지 않으면 반칙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데, 달력까지 서두르고 있으니 가속이 붙는 듯하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에 편승하여 가는 해와 오는 해의 달력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매달 첫날이면 일정을 잊지 않기 위해 탁상 위의 달력에 메모해두는 습관이 있다. 망각으로 인해 사람 노릇 못하는 일을 예방하려는 나름의 안전장치다. 연말이 되니 탁상 탈력에 쓰인 12라는 숫자가 유달리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달이니 달리 보인 것은 당연하다. 12월의 달력은 나에게 회고와 반성의 단서 역할을 한다. 지난해의 달력을 한 장 한 장 거꾸로 넘겨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달력에 쓰인 기록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렇고 그런 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내 나름으로는 소중한 일들이었다.
날짜 밑에 빼곡히 쓰인 그 날의 일정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들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록된 내용도 가지가지다. 모임을 비롯하여 가족의 생일과 집안의 대소사는 기본적 기록이다. 주말에는 지인 자녀의 결혼 일정이 쓰여 있다. 운동, 난타, 평생교육원 수강 등은 지정된 요일이 따로 있다. 세상이 바삐 돌아가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며 세상 탓을 해보기도 하지만, 바쁘게 서두르며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보도매체들이 내놓은 연말 뉴스의 결산에 의하면 올해도 역시 어려운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어느 한 해 다사다난이란 수식어가 붙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람 사는 세상 속의 작지만 소중한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그게 묻혀버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연말이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 관한 일들을 되돌아보며 이를 평가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만족스럽다기보다는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계획이란 어느 정도 높고 크게 세워야 개선과 발전을 기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짐을 지고, 차근차근 해야 될 일도 단박에 해치우려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생활 속의 과적과 과속 때문에 결국은 그 무게에 자신이 눌리게 되는 것이다.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남보다 앞서 이루려는 조급함까지 더해진다면, 작은 일들은 저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큰일에만 지나치게 집착하여 작은 일들을 무시해버린다면 송년의 결산은 늘 허탈과 아쉬움으로 남기 마련이다. 각박한 현실을 핑계로 ‘작지만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을 외면해온 결과다.
하루하루의 삶은 작은 일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저변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작지만 소중한 일들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일들 안에는 사람 냄새가 묻어있다. 이들은 차근차근 쌓이면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큰 이름으로 나타날 귀한 것들이다.
이렇듯 작지만 소중한 일들을 하나하나 챙기다 보면, 지나간 한 해는 결코 아쉬운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작은 일이라고 결코 하찮은 게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면 송년은 더욱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송년의 길목에서는 작은 성취들을 하나하나 챙기며 지긋이 미소 지어보는 것이 좋을 성싶다. 나도 올 연말에는 이루지 못한 큰일을 끌어안고 아쉬움에 매달리기보다는 숨고르기를 해야겠다. 추리작가 코난 도일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작은 것일수록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라는 말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안은 채 오는 해를 맞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가지고 갈 것은 챙겨두는 것이 현명할 성싶다. 한해의 끝자락은 그걸 정리하는 절호의 기회다. 올 송년엔 잠깐 멈추자. 그리고 쉼표 하나 가뿐하게 찍으며 숨을 고르고 가자. (2013.12.17. -한 해를 보내며-)
(3년 전 이맘때 전주 경기전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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