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걸으니 보이는 것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경근
1월 초면 한겨울인데도 그리 춥지는 않은 날, 내장산에 있는 원적골 탐방로를 찾았다.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내장사, 원적암, 벽련암을 거쳐 다시 일주문에 이르는 약 4㎞ 정도의 산책길이다. 특별한 난코스가 없어 초등학생도 거뜬한 길이다. 난 이 탐방로를 한 달에 대여섯 번씩은 걷기 때문에 눈 감고도 훤하다. 이날은 겨울 산길을 혼자 즐기고 싶어 달랑 수첩 하나만 들고 나섰다. 혼자 걸으면 어떤 것들이 보일까?
일주문 문턱을 넘어서니 내장사에 이르는 300여 m 길에 108개의 단풍나무가 좌우로 도열해 있다. 세파에 어지럽혀진 중생의 마음이 절로 가지런해진다. 바람결 따라 풍경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도 잘잘거리며 화답했다. 절 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 원적골로 진입했다. 곧바로 나타난 오솔길이 구불구불하다. 이곳은 종일 햇빛이 들지 않아서인지 바닥은 얼어있고 지난해 끝자락에 내렸던 눈도 여기저기 남아있다. 감나무 아래 땅바닥엔 빨간 감이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져 있다. 얼었던 까치밥이 풀려 주저앉았나 보다. 반쯤 물러터진 감을 쪼다 떨어뜨린 까치는 상심이 컸을 성싶다.
원적골의 겨울 숲은 한 점의 꾸밈도 없이 의연하다. 그야말로 민얼굴에 무색무취(無色無臭)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 가뿐해보인다. 여름의 짙푸른 녹음도 가을의 화려한 단풍도 깡그리 잊은 듯하다. 한때 사람들이 쏟아냈던 탄사에 으스대던 기억도 지운 것 같다. 소리 없이 내공의 힘을 쌓아가고 있음이리라.
얼은 길바닥은 미끄덩거리지만, 간간이 부스러진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며 호시절을 기억해준다. 쉬어가듯 고인 물속에는 나무들이 거꾸로 잠겨있으며, 그 속에 비친 하늘은 아스라하다. 숲 속에는 제 명이 다한 나무가 군데군데 드러누워 있다. 나무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는 가 보다.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일 것이니 나무의 삶과 무엇이 다르랴.
절에서 20여 분쯤 걸으니 쉼터가 나타났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원적암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끝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의 장구한 세월 앞에 발길을 멈췄다. 400년 동안의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텨온 연륜에 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아직도 청년처럼 우람하고 푸르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청아하다. 한겨울에도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비자나무 가지 사이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산 중턱에 얹혀있는 원적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조용하고 정결하여 작은 헛기침 소리조차 멋쩍다. 암자는 뒤에 솟아있는 불출봉의 위용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스님이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그런 곳이다. 마루는 시골의 툇마루처럼 걸터앉기에 좋고, 마당 끝에 서면 산봉우리들이 손에 닿을 듯 다가온다. 나그네가 숨 고르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여기서부터는 산허리를 따라 거칠 것 없는 탐방로가 이어진다. 그야말로 일사천리(一瀉千里)다. 한겨울인데도 걷는 내내 햇빛이 따라다녔다. 아직 땅속으로 돌아가지 못한 낙엽은 발밑의 감촉을 부드럽고 편하게 했다. 탐방로 어귀의 빙판과는 딴판이다. 가까이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들이 동무하듯 따르며, 멀리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지그시 바라봐준다. 걷는 순간 보이는 것들, 이보다 더 좋을 볼거리는 없을 성싶다.
너덜겅으로 만들어진 ‘사랑의 다리’가 눈앞이다. ‘딸각다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나에게도 유별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딸각 소리를 내지 않고 이 다리를 걸으면 아들을 난다 했다. 내가 내리 딸 셋을 낳고 조바심 끝에 막내아들을 가졌었는데, 그게 이 다리를 건넌 뒤의 일이었다. 그때는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며 걸었었다. 아무튼 전해오는 이야기대로 아들을 얻었다. 오늘은 부러 딸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었다. 행여 소리 내지 않고 건너다가 이 나이에 아들을 낳으면 안 되겠지 하는 생뚱맞은 생각에 혼자 웃음 지었다.
허리쯤 닿는 산죽 숲을 지나니 곧바로 벽련암이다. 옛 내장사 터로 알려진 암자다. 뒤편으로 내장산의 주봉인 서래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명품 봉우리라 소문날 만큼 그 위용과 모양새가 빼어나다. 암자 앞마당에 서서 사방으로 보이는 경관을 두루 살펴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서운할 곳이다. 특히 벽련암 입구에 있는 누각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으면 편안함이 이런 것이려니 싶다. 시인으로도 이름난 큰스님이 들르기라도 하면 특별한 덤을 맛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불가(佛家)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벽련암부터는 내리막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이곳의 나무들도 한결같이 적나라하고 당당하다.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큼직한 혹을 짊어진 고목이 서 있던 자리가 휑하다. 숲속을 들여다보니 길게 누워 있다. 결국은 혹 때문에 삶을 마감했나 보다. 자연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마지막 쉼터인 허름한 가게는 이날도 문이 닫혀있었다. ‘벌떡주, 쭈쭈바 있습니다.’라고 쓰인 낡은 판자때기 간판이 을씨년스럽다. 단풍철 말고는 늘 주인이 없으니, 닫혀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출발한지 1시간 반 만에 다시 일주문에 당도했다. 몸은 가뿐하고 기분은 상쾌하다. 이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걸었다. 그렇다고 결코 홀로 걸은 건 아니다. 자연 속의 길동무를 수없이 만났으니 말이다. 그동안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본 둥 만 둥 지나쳤던 존재들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날 최고의 소득은 잊혔던 또 다른 나를 만난 것이다. 나만의 특별한 행운이다. (2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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