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멀찌감치 아파트 불빛이 보이는 곳에 작은 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나 있는데, 여름밤엔 자전거보다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열대야를 피해 집을 나온 사람들은 밤길을 걸으며 피서와 운동을 즐기는 일거양득을 누리고 있습니다.
탁 트인 길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선선한 바람결이 온몸을 매만집니다. 으스름한 밤길이 오히려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니, 밤길도 이 정도면 걸을 만합니다. 때로는 반딧불이 매달고 다니는 빛 주머니도 목격할 수 있으니, 이는 밤길을 걷는 산책객들만이 만날 수 있는 특혜입니다. 참 마음 편한 밤길입니다.
으스름한 달빛이 비치며 마음까지 여유로우면 어린 시절 추억의 밤길을 반추하게 됩니다. 그때의 밤길은 참 무서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 데는 그 연유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간 학습을 마치면 밤길을 십여 리쯤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자갈이 울퉁불퉁 깔린 신작로를 따라 한참 걸은 후 다시 고갯길을 넘어야 했습니다. 보리밥 몇 술에 밤까지 입시공부를 한답시고 시달린 후의 하굣길은 참으로 심란했습니다.
고갯길 부근엔 마을조차 없었으며 대신 좌우로 공동묘지와 솔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려면 어른들이 이야기하던 온갖 귀신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달걀귀신, 몽달귀신, 처녀귀신, 또망귀신……. 그땐 무슨 귀신이 그리 많았는지. 어른들은 끄떡하면 귀신 이야기를 들이대며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귀신의 등장은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버릇을 고칠 때도 귀신을 들먹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린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고갯길이었습니다.
온몸이 오싹하여 친구들끼리 손을 꽉 잡고 걸어야만 했습니다. 어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들리게 되면 우리는 거의 껴안다시피 했습니다. 고개를 넘고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전까지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밤길은 내 눈으로 단한 번 본 일조차 없는 그놈의 귀신들 때문에 무섭기만 했습니다. 당시의 시골 신작로의 밤길에는 행인은 물론 자동차도 지나다니지 않아 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운이 좋은 밤도 있었습니다. 이날도 공포의 고갯길로 접어드는데, 마침 멀리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의 기척을 알아챈 우리는 너무 반가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우리 마을 이장 아저씨였습니다. 면 소재지에 나왔다가 막걸리 몇 잔 나누다 보니 늦었다며 반갑게 대해주었습니다. 이장 아저씨의 뒤에 바짝 붙어 쫄랑거리는 우리의 밤길은 너무 홀가분했습니다. 그 시절 밤길에 무서운 것은 실체도 없는 귀신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순박함이 서려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발길 걷기가 무섭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립니다. 무서운 대상은 옛날처럼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밤길을 걷다보면 취객의 시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답니다. 날치기, 폭행, 성추행 등 입에 올리기조차 짜증나는 행태들 때문에 밤길이 불안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어느 때부터인지 밤길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습다. 늦은 밤길을 걷게 될 경우 호젓한 길을 만나면 좀 멀더라도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게 상책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경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발길의 사람을 경계하듯, 그 사람도 나를 경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밤길에 행여 귀신이 나올까 경계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귀신이 사람 무서워 나돌아 다니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 시절 낭만과 정겨움이 있던 밤길이 그립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밤길에서 만났던 이장 아저씨 같은 분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 2013. 7. 26 -
'★요즘 이야기★ >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천 원이십니다." (0) | 2013.08.24 |
---|---|
외손자의 반격 (0) | 2013.08.13 |
실버들의 땀나는 잔치, 전국생활체육배구대회에 참가하다. (0) | 2013.07.07 |
상은 이미 받은 거나 진배없지요. (0) | 2013.07.01 |
고속도로 위의 두 얼굴 (0) | 201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