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신(不信)의 인자(因子)'
그 동안 비닐포대에 넣어두었던 마른 고추를 아파트 거실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빈 주차장에 널었습니다.
요즘 잦은 비 때문에 조금 눅눅해진 것 같아, 서너 시간 정도 볕에 말려 빻을 작정이었습니다.
나는 거실의 창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널려있는 고추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카메라까지 옆에 두고 말입니다.
말이 살펴보는 것이지, 지킨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혹시 누군가 돗자리 채 둘둘 말아 싣고 달아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고추 값이 여간 비싸지 않은가?
농촌에선 널어놓은 고추를 통째로 훔쳐가는 일이 종종 있다는 보도를 들은 일이 있는데,
오늘 여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에 미쳤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이 넘도록 우리 고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일방적인 생각은 오버해도 한참 오버한 것입니다. 나는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려 옴을 느꼈습니다.
나에게 의심과 불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요즘은 불신의 시대다.’ ‘사람들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등등.
그 동안 이런저런 세태를 탓하는 주장에 동조해왔던 나 아닌가?
마치 나는 그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듯. 그것도 당당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나의 행동은 불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불신의 인자(因子)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2012. 9.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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