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련하기'보다 '버리기'가 더 힘들어
18년 동안 살던 집을 처분하고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습니다.
짐을 다 싣고 나서 텅 빈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잠시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살던 집은 젊은 시절 일곱 차례 이사 끝에 어렵게 마련했던 아파트라 사실 애착이 많았습니다.
현관 입구에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이사도우미가 한 마디 건넸습니다.
“염려 마시고 새 집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우리가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요.”
‘이 사람들, 남의 속도 모르고 먼저 가라 하는구나.’
나는 이곳에서의 지난 생활들을 반추해며, 마지막으로 이 방 저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삿날 점심때 무렵부터 태풍 볼라벤이 우리 고장을 덮치기 시작할 거라는 예보에 긴장했지만,
다행히 새 집에 짐을 온전히 내려놓기까지 태풍은 멈칫거려 주었습니다.
나의 이사 이력은 결혼 분가(分家)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로 근무지를 따라 몇 라례 거처를 얻어 옮겨 다닌 끝에,
십여 년 만에 새로 지은 방 세 개짜리 연립주택을 사서 입주했습니다.
처음으로 내 집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은 아마 그때가 정점이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도 비교적 넉넉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에 한 시름을 놓았습니다.
이사는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가족 집단의 생활과 정서 시스템에도 변화를 주는 행위였습니다.
이번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살림들을 들춰내고 보니, 숨어 있던 묵은 짐들이 엄청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물건의 종류와 양은 나의 나이와 비례하며 불어났던 모양입니다.
그 동안 쓰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사용되지 못할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쌓아두자니 거추장스럽고, 힘들여 마련한 것을 생각하면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었습니다.
그 동안 내핍과 절약의 증표들입니다.
그렇지만 버릴 건 버릴 줄 아는 것도 노년의 지혜라 생각하며 마음먹고 정리했습니다.
새로운 살림을 골라 사는 일보다, 선택하여 버리는 일이 더 어려웠습니다.
한국의 나이 든 이의 사는 모습이 거의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 단 한 번의 안락한 이사만 남은 것 같습니다.
- 2012. 8. 27 -
'★요즘 이야기★ >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홍신 특강 경청, '인생이 뭐길래.' (0) | 2012.09.07 |
---|---|
'오늘따라 '용혜원 시인'이 땡긴다.’ (0) | 2012.08.31 |
촌부의 '속깊은 생활철학' (0) | 2012.08.22 |
'폭(暴)'자(字)를 앞세운 ‘기상용어(氣象用語) 4종 세트’ (0) | 2012.07.31 |
‘서른’에 가신 나의 할아버지 (0) | 2012.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