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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가신 나의 할아버지

 

   ‘서른’에 가신 나의 할아버지

 

 ‘어느 날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궁궐을 세운 염라대왕이 현판 글씨를 쓸 천하의 명필을 구하다 마침내 운천공(雲川公)을 지명하고, 사자를 보내 모셔가는 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운천공(雲川公)이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비보가 전해졌으니, 부안(扶安)의 빛을 잃었다 하여 일대가 슬픔이 빠졌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문중과 부안 일원에 구전(口傳)되고 있습니다. 비범한 재기(才氣)가 급히 필요하여 저 세상에서 서둘러 모셔갔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운천공(雲川公)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8개월만인 30세에 돌아가셨으니, 너무 이른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87년 전입니다.

 20여 년 전, 그러니까 돌아가신지 66년 만에,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노력으로 할아버지의 유작을 모아 엮은 ‘운천시묵집(雲川詩墨集)’이 세상에 나왔었습니다. 이 시묵집에 나온 한시와 서예는 할아버지께서 20대에 쓰신 것들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천재성에 감탄을 넘어 숙연해지기조차 합니다.

 할아버지의 요절을 천명이라 받아들였겠지만, 당시 자손들이 겪었을 안타까움과 탄식이 얼마나 컸을까?

 할아버지의 글과 글씨를 들여다보면서 상념에 젖어 봅니다.

 

 - 나의 큰 아버님이 쓰신 ‘운천시묵집의 머리글’ -

 오호(嗚呼)라. 이 시묵집은 선고(先考) 운천공께서 년 20에서 30사이에 읊은 한시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서예 습작들을 모은 가문의 보배이다. 선고께서는 천품(天稟)이 경오(顈悟)하시고 재기(才氣)가 초범(超凡)하시어 문학을 일찍이 이루었다. 또 19세에 당시 명필인 운정(芸庭)선생의 서첩을 받아 단 1년의 독습(獨習)으로 그 묘법(妙法)을 해득하였다.

 전고미문(前古未聞)의 기재(奇才)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문필의 명성이 사방에 높았고, 학문으로 성인의 도를 배워 심신의 체험을 통해 덕을 이루었다. 평소 일언일행(一言一行)이 중도(中道)에 어긋남이 없었고, 정중한 자세와 청고(淸高)한 기상이며 고결한 의관은 완연히 선인(仙人)의 태도요, 속세인(俗世人)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명사들의 평이었다.

 년 30에 홀연히 가시니 우리 가운(家運)의 불행은 말할 나위 없고 부안(扶安) 일경(一境)이 빛을 잃었다 하여 사림(士林)이 탄식하여 아까워했다. 슬프다. 이러한 문예(文藝)와 이러한 도학(道學)으로 하수(遐壽)하셨다면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으리라. 가운(家運)도 흥창(興昌)하였을 것이오, 나와 같은 비재(菲才)도 이렇듯 낙척(落拓)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천명(天命)을 어이하랴. 이 천명이라는 두 글자는 내 일생에 탐구의 초점이 되었다.

 당시 불초(不肖)의 나이 14세라 모든 의사가 미급(未及)했으나, 선고(先考)의 유적(遺蹟)이 민멸(泯滅)하게 됨이 통한하여 일기장에 흩어져 있던 시와 습자지에 묻힌 글씨들을 낱낱이 수집했고, 외가에 있던 액자 한 폭과 서간문 두어 장을 얻어 허름하게나마 서첩과 시집을 만들어 소중히 보관해왔다. 그러나 내 나이 80이 되어 가니 두려운 마음이 들어 자손에게 선고의 높은 사상과 맑은 지취(志趣)를 알리고자 이 시묵집을 번역 출간하는 것이다.

 자손들이 잘 받들어 모신다면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또 수시로 읽고 음미하면 자연의 진리와 시의 음률이 저절로 터득되리라 믿는다. 이 시묵집은 우리 집 전통의 빛이오, 가보(家寶)이다. 자손의 계승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 나의 아버지가 쓰신 ‘운천시묵집의 끝에 붙인 글’ -

 년(年)30에 문득 유명(幽明)을 달리 하신 선고(先考) 운천공의 유작들이 66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만감이 교차함과 아울러 편집의 미흡함에 송구할 따름이다.

 어느 날 인동(隣洞)의 한 분이 꿈을 꾸는데 궁궐을 세운 염라대왕이 현판 글씨를 쓸 천하의 명필을 구하다 마침내 운천공을 지명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모셔가는 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아침 운천공이 운명하셨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구전(口傳)되고 있다. 생후 8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읜 나는 유작(遺作)들로나마 선친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고 시묵(詩墨)에서 풍기는 고매(高邁)한 인격과 예술적 기품에 심취할 수 있었음을 천행(天幸)으로 여겨왔다. 15년 전에 부안군 백산의 오문(吳門)에서 우연히 선친의 친필을 발견한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젖었으며 한편으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을 실감하기도 했다.

 또한 내가 서도(書道)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의 필력(筆力)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에 부끄러울 정도이나 사백(舍伯) 가은공(葭隱公)은 모든 면에서 부친을 이어받았다고 확언할 수 있다. 또한 14세의 어린 나이로 맞은 부몰(父沒)의 통한(痛恨) 속에서도 유작을 모아 서책으로 소중히 보존해온 정성과 집념은 우리 가문이 큰 교훈으로 간직해야 한다.

 선비(先妣)의 유필(遺筆)인 한글 내간문(內間文) 두 점이 함께 수록된 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하겠다. 33세에 부군과 사별하고 우리 7남매를 기르시느라 고혈(膏血)이 마르신 어머님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 시묵집을 구천(九天)에 계시는 부모님께 바치나이다.

                                                                                                                         - 1990년 경오 3월 -

 (시묵집과 그 안에 실린 글씨와 글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