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의 안쓰럽던 모습
부안에 사시던 고모님이 전주로 이사 가던 날,
나는 정들었던 고모님 댁을 떠나 부안중학교 유학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부득이 고향으로 되돌아온 한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산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환경의 변화에 낯가림이 많았던 나는 학년 초엔 새 학교 적응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 한 마을 친구들이 다니고 있던 학교라 그럭저럭 젖어들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4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시골의 울퉁불퉁한 도로인지라 걷기도 힘들고 자동차라도 지나갈 때면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합니다.
거기다 길을 정비한다고 자갈이라도 깔아놓은 날은 고행길입니다.
책과 도시락이 든 가방의 무게에 짓눌리며 교문에 들어설 때쯤이면 너나없이 어깨도 늘어지고 다리도 풀리기 마련입니다.
등하교에 걸리는 왕복 두어 시간 동안 학생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내기라도 하듯 저마다 빠른 걸음을 내딛는 학생,
세월아 가거라며 어깨를 늘어뜨린 채 느릿느릿 걷는 학생,
무언가 적은 종이를 가끔 들여다보며 입술을 딸싹거리며 걷는 학생…….
그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내달리는 학생이 가장 부러웠으나, 내 자전거를 갖는다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자전거는 그 집의 재산 목록 순위에 드는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지루하고 무료한 등굣길의 두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나름대로의 방책을 생각한 끝에,
영어 단어 열 개씩이 적힌 쪽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쪽지는 잠깐씩 들여다보면서 외우기 쉽도록 손아귀에 쏙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영어에 흥미가 있었던지라, 학교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리 어렵지 않게 거의 암기할 수 있었습니다.
동행하는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외울 때는 훨씬 재미있고 수월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하교하는 도중에 한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들보다 두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한 청년이 '동동구리무! 동동구리무!'를 외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무료하던 터에 별 생각 없이 그 청년이 외치는 소리를 흉내 냈습니다.
봇짐장사들이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흔히 외치는 그 소리를 따라했을 뿐인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화가 잔뜩 난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동동구리무 봇짐을 길바닥에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슨 사고를 저지를 듯 우리들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일행 중 가장 달리기가 느렸던 나는 그만 가방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끈마저 끊긴 채 길바닥에 여지없이 내동댕이쳐진 가방에서는 책과 도시락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
그때서야 그 청년은 화가 좀 풀렸는지 동동구리무 봇짐을 챙겨들고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나는 되돌아서는 그 청년의 얼굴에서 땀인지 눈물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종일 구리무 한 통 팔지 못해 심란한 터에, 운이 좋아 중학교에 다니는 놈들이 청년의 화를 돋운 것입니다.
그날 재미삼아 했던 나의 행동은 청년을 무시한 고약한 마음보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없음도, 마음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몹쓸 생각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그 청년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철없는 행동과 끊어진 가방 끈에 대한 인과응보라 생각하며,
그해 여름이 다가도록 끈 없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끙끙대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어쨌든 그 등굣길의 단어쪽지 덕분인지 중학 시절의 영어 성적은 꽤 괜찮은 편이었으며,
고교 때에는 영어 시험만은 자주 일등을 하여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주교대에 진학하면서, 교대의 특성과 교과의 편제상 영어과가 뒷전으로 밀리며
영어 공부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고교 시절 담임교사의 권유대로 전북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했더라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등록금의 장벽 때문에 제대로 졸업도 못하고 어중간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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