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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연둣빛

가족사랑의 작은 몸짓으로 장겨웠던 그 시절 여름밤

       가족 사랑의 작은 몸짓으로   정겨웠던 그 시절 여름밤

 

며칠 전만 해도 여름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 아닌 가 했더니,

요즈음 따가운 햇볕과 함께 막바지 더위가 다시 찾아와 계절 값을 하고 있습니다.

한낮의 더위가 열대야로 이어지던 지난 밤,

가족끼리 둘러앉아 시원한 수박 몇 조각으로 더위를 식히던 중, 그 안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여름밤을 만났습니다.  

그 옛날 시골에서 여름밤의 시작은 어느 집이나 비슷했습니다.

생풀을 한 아름 쳐다가 마당 한쪽에 펼쳐놓은 멍석 옆에 모깃불을 지피면,

온 가족이 오순도순 저녁상에 둘러앉습니다.

그 당시 멍석은 낮에는 곡식을 말리는 장소였지만, 저녁엔 식당과 휴게실이며,

때로는 잠자리도 되는 유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상을 물리고 나면 여름밤의 평화로운 휴식이 이어집니다.

선득거리는 멍석에 드러누우면 더위도 저만치 물러가고 별들이 끝없이 널려 있는 밤하늘이 다가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별 무리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나도 이미 별이 되어버린 듯 꿈결 같은 환상 속에 빠져듭니다.

모기를 쫓기 위해 토닥거리는 어머니의 줄부채 소리가 아니었으면 밤하늘 여행길에서 잠이 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땐 모깃불도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밤,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멍석 위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쉬고 있었습니다.

보리밥 몇 숟갈로 대충 때운지라 금세 뱃속이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낮에 마을 어귀에 있는 수박밭 옆을 지나면서

녹색 이파리들 사이로 보였던 커다란 수박 덩어리가 갑자기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늘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 표정만 보아도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기술이 있었던 가 봅니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하신 듯, 드디어 기다리던 말씀을 꺼냈습니다.

 "야들아, 수박이라도 한 덩이 사 주렴?"

우리 형제들은 너무 좋아서 펄펄 뛰었고, 아버지도 내심 기다렸는지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식의 표정은 동의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거지를 대충 마친 어머니는 골방에 가서 겉보리 몇 됫박을 자루에 담아 오셨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라며 말리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나는 한발 앞서 나섰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도 함께 가기로 약속되었는지 벌써 사립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박을 싸게 준다고 소문난 원두막은 자갈길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이웃 마을에 있었습니다.

함께 가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도 가볍고 거침이 없었으며,

도란도란 주고받는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환한 달빛과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수를 놓고 있는 여름의 밤하늘은 동화 속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인심 좋은 원두막 주인은 수박 한 덩이 사는데, 덤으로 조그만 참외 몇 개를 얹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수박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나는 참외 두 개를 양손에 꽉 쥔 채 쫄랑쫄랑 뒤를 따랐습니다.

집에서 꼬박꼬박 기다리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달빛에 겹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마당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모깃불을 뒤적이고 계셨고,

멍석 위에 누워 있던 동생들이 벌떡 일어나 수박을 빼앗듯 받아갔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먹던 수박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의 오붓한 수박 잔치는 달빛 가득한 여름  밤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정겨운 잔치에 행여 불청객이라도 날아들까 봐 연신 모깃불을 뒤적이시느라 멍석을 오르내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향해 쉼 없이 부채질을 하시며, 수박 쟁반을 자꾸 우리들 앞으로 밀어놓으셨습니다.

철없던 나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먹어치운 후까지도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잘 타고 있는 모깃불을 괜히 뒤적이시는 것도,

어머니가 쟁반을 연신 우리에게 밀친 것도 실은 자식들만을 생각하는 부모님의 따뜻한 신호였는데…….


여름밤에 별빛 쏟아지던 마당, 허름한 멍석,

그리고 너덜너덜했던 줄부채는 한결같이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추억거리입니다.

그러나 지난밤에 반세기도 훌쩍 넘은 그 시절 여름밤을 찾아가

내가 정녕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정겨웠던 이야기와 사랑의 몸짓, 하찮은 것에 대한 감사와 소중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 1958년 여름, 그리고 오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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