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족의 추억
학교 교육 활동 중에서 오랫 동안 이어오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야외 학습을 위한 바깥나들이입니다.
이 활동이 이처럼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그 안에 있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너나없이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그 명칭과 모습은 많이 변화되어 왔으며, 이를 통해 교육의 한 단면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국민학생 시절인 1950년대에는 '원족'이라 하였고, 교직 생활 전반기인 1970년대부터 한동안은 '소풍'이라 불리더니,
후반기인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장학습'이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원족은 글자 그대로 멀리 걸어가는 나들이로, 당시에 의지력과 극기를 다지는 교육활동의 일환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풍은 자연 관찰이나 역사 유적 따위의 견학을 겸하여 야외로 갔다 오는 일이라지만.
용어가 말해주듯 가벼운 나들이의 의미를 가미한 활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로 현장학습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학교 학습의 연장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던 바깥나들이는 여전히 아이들이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일로,
먼 훗날 학창 시절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는 것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특별한 일로 남아서 내 기억 창고의 한 쪽을 채우고 있는 추억의 원족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부안 변산에 있는 개암사로 원족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흉년으로 긂주리던 우리 마을 사람들이
송기라 불리던 소나무 속껄질을 먹을거리로 장만하기 위해 허기에 지친 낫질을 하던 산이 변산이라 했습니다.
가족들의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애환이 서린 산이 변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맑은 날이면 개암사 뒤편에 있다는 울금바위가 어럼풋이 보였으며,
그 곳은 우리 학교에서 삼십 리도 넘는 먼 거리라는 것이 개암사에 대한 내 지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삼십 리가 얼마나 되는 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지 어린 나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완전무장을 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완전무장이라야 벤또라고 불리던 도시락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선생님은 서쪽 방향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산줄기와 그 위에 버티고 있는 큼직한 바위를 가리키며
그 바위 아래에 우리가 찾아가는 개암사가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원족 대열이 텅빈 운동장을 뒤로 하고 교문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마을을 지나 나즈막한 언덕배기를 넘어서니, 확 트인 벌판이 우리를 반기듯 가슴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교가 멀어질수록 우리들은 대자연의 품 속으로 깊숙히 들어갔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등굣길의 통학반 대열에서 불렀던 노래도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우리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낯선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우물로 달려가 쭈그러진 두레박을 퍼올리며 갈증부터 달랬습니다.
원족은 당연히 많이 걷는 것이라지만, 열 두어 살 우리들에게는 버거운 나들이였습니다.
부안 땅에 접어드니 울금바우가 그 위용을 드러내며 위압적으로 다가섰지만, 금방 닿을 듯 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참다 못한 아이들이 일부러 다리를 절룩거리며 보채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습니다.
"원족은 다 이런 거야.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참아라."
선생님은 아이들의 원성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에야 개암사의 입구에 들어서니,
넓은 마당과 허름한 대웅전에서는 옛 향취가 그대로 풍겨나오는 듯 했습니다.
고개를 쳐들어 절 뒤편의 산등성이를 보니,
학교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울금바위가 금방 손에 닿을 듯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크고 넓은 바위가 양반자세로 앉아 호령하고 있는 형상같아 나는 절로 움츠려 들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자꾸 도시락으로 눈이 가며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신호입니다.
원족이라는 설렘으로 아침 밥을 대충 먹은 떼운 데다 세 시간은 족히 걸었으니, 당연한 생리 작용이었습니다.
빛 바랜 양은도시락 뚜껑을 여니, 여느 날과는 모양새가 다른 밥과 반찬이 그득 담겨 있었습니다.
이걸 채우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엌에서 딸그락거렸던 어머니에게 나는 철없이 용돈 타령을 하며 투덜댔었습니다.
도시락의 한켠에 자리잡은 반찬 그릇엔 늘 있던 김치 대신
원족날의 특별 반찬인 멸치볶음과 갈치토막 그리고 단무지가 먹음직스럽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옆에 있는 친구들의 도시락을 가끔 곁눈질로 들여다보며 밥 한 알 남기지 않고 맛나게 먹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꾸역구역 서둘러 먹다가 얹혔는 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치는 친구도 눈에 띠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울금바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선생님의 재촉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그 가파른 산을 잘도 기어 올라갔습니다.
오전 내내 걸었는데도 도시락으로 배를 채워 다시 힘이 솟는가 봅니다.
바위는 웅장한 자태로 앞쪽은 마치 거대한 동물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듯
움푹 파여 있어 우리 반 아이들을 다 품고도 남았습니다.
울금바위 윗면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남긴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너무 높아 올라갈 수는 없다는 선생님 말씀 때문에 호기심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암사 원족에서는 지난 봄 두승산 원족 때와는 달리 보물찾기나 수건 돌리기는 아예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으며,
싫증이 나도록 많이 걷는 바람에 재미있는 놀이는 모두 뒷전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어둡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서들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전 내내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몇 마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리가 아파왔습니다. 빈 도시락은 짜증을 내듯 딸딸거리며 따라왔습니다.
오던 길은 신바람나고 주변에 보이는 것들도 새로웠는데, 돌아가는 기분이나 몸이 영 딴판이었습니다.
얼마를 걸었는 지 들판 한복판을 지나고 있으려니, 해는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곧 이어 땅거미가 지면서 마을의 집들도 희미하게 보이고 신발에는 이슬이 채이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가을 해는 이미 제 집 찾아 몸을 식히고 있을 터인데, 우리는 터덜거리며 걷기를 계속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준 대로 배양구지, 주촌, 장자터 방면에 사는 아이들을 한데 뭉쳐서 걸었습니다.
사방이 어둡고 으슴푸레하여 오싹한 기분이 들자,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 단위로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마을 어귀의 팽나무와 함께 희미한 등불 몇 개가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어깨를 펴고 한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두려움도 지친 몸도 일순간에 풀리는 듯 했습니다.
희미한 등불을 들고 모정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겼습니다.
어머니들은 어둠 속에서 발걸음만 보아도 자기 아들 딸은 용케도 알아보는 기술이 있었나 봅니다.
"무슨 놈의 원족이 아침에 갔다가 밤중에 들온다냐?"
어머니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은 저마다 쫄랑거리며 고샅길을 따라 제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도 우리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가며 어리꽝을 부려 봤습니다.
"애고 다리야. 아들 죽겄네."
"엄살은…. 귀경 잘 혔냐?"
마을은 다시 조용해지고 길고도 힘겨운 원족도 막을 내렸습니다.
아침에 나서서 밤중에 돌아온 그때의 힘들었던 원족길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아직도 그리움을 자아냅니다.
- 1958년 무렵 -
(부안 개암사와 울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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