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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연둣빛

그날의 기적소리

     그날의 기적소리

 

요즘은 자고 깨는 시각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초저녁 잠이 많아지고 대신 일찌감치 잠이 깬다는데, 나도 그 삶의 리듬을 피할 수 없나 봅니다.

어제 밤에도 9시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대신

어김없이 새벽녘에 눈이 떠졌습니다.

아직 사방은 어둡고 적막한데, 베란다 문을 만지작거리는 가을비 소리만이 들릴 듯 말 듯 귀를 간질입니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는 사이에 아스라이 기적소리 한 줄기가 들려왔습니다.

잠시 동안의 그 기적소리는 여운으로 멈추며, 어린 시절 어느 날 내 귀에 박혔던 그 슬픈 기적소리를 다시 끌어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 기적소리를 따라 어린 시절의 상념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제처럼 뒷밭에서 일하시고 아버지는 또 마을 일로 면사무소에 가셨는가 봅니다. 

마당에는 보송보송한 병아리들이 암탉 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여기저기 쪼아대고 있을 뿐, 주인이 들어와도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책보를 마루에 내동댕이치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들어가 항아리 속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하굣길 내내 타도록 말랐던 목이 이제야 풀리고 헐렁한 배도 탱탱해졌습니다.

뒷밭으로 달려가 보니, 채소밭 고랑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어머니 보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소나무 그늘 밑에 퍽석 주저앉아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수건을 둘러맨 머리, 호미가 들린 투박한 손, 거무튀튀하게 여윈 얼굴…….

어머니는 농사철 내내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땀이 밴 어머니의 등짝에는 늘 무거운 것이 얹혀 있는 듯, 한시도 가벼이 보인 적이 없습니다.

 "아랫시암에 가서 물 한 주전자만 퍼 오거라. 글고 가서 집이나 잘 봐라."  

나는 아랫시암으로 냅다 달려가서 시원한 물 한 주전자를 넘치도록 담아 왔습니다.

그때 큼직한 가죽가방을 맨 우체부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사라졌습니다.  

"전보 왔어요." 어머니는 그걸 펼쳐보자마자,

많이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던 호미를 내던지고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어머니 뒤를 따라 뛰었습니다. 

전보는 급한 소식을 전하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지라, 어머니에게 아주 급한 일이 생긴 건 틀림없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많이 위급하신가 보다. 나 외갓집 좀 얼름 댕겨 오마." 

어머니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시고 신작로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안 계신 집에는 나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있을 뿐, 온 집안이 순식간에 휑해졌습니다.  

잠시 후에 놀러 나갔던 동생들이 돌아오고, 아버지는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에야 들어오셔서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많이 아파서 외갓집에 가셨다는 내 말에, 아버지도 무척 심란하신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어머니의 빈 자리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저녁밥을 지으시느라 부엌과 장독대를 분주히 오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야 할 텐데 말입니다. 

동생과 나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립문 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엄마는 오늘 못 온다. 기다리지 말거라."

나는 그날 처음으로 부엌에서 밥을 짓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으며,

어머니 없는 방에서 아버지가 차린 밥을 먹었습니다. 

그 비좁던 방이 이처럼 넓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밥상을 물리고 보니 어머니 그림자가 없는 방 안은 호롱불만이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방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도 행여 어머니가 오실까 해서 눈을 들이 밀었습니다.

마실 다녀오는 마을 사람이 지나가는 인기척에도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동생들도 시무룩한 채 고개를 떨어드리고 있는 걸 보니, 나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오락가락한가 봅니다.

"야들아, 그만 자자."

아버지가 호롱불을 끄자, 우리 집은 온통 어둠과 고요 속에 파묻혔습니다.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베개를 붙들고 잠을 청해보지만, 어머니의 잔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기적소리에 그만 참있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예전에도 궂은 날 밤에 기적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20여리 떨어진 신태인 역을 지날 때 내는 소리라 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 갈 때 우리가 걸어가던 길옆으로 쭉 뻗은 철로가 있었는데,

나는 운 좋게도 지나가는 기차를 한번 본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 일을 친구들한테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을 했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기차, 기적소리, 어머니라는 세 단어가 연상의 고리를 지어 어머니 생각에 불을 지폈습니다.

나는 참다못해 베개에 머리를 묻고 훌쩍거렸습니다.

"엄마는 내일이면 올 터이니 그만 자거라."

아버지는 이불을 덮어주며 다독거렸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이내 잠이 들었지만.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빈 자리가 그처럼 넓은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