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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선학을 닮은 우리 아버지

                    선학(仙鶴)을 닮은 우리 아버지


  내가 근무하는 교장실 벽에는 '元亨利貞天道之常 仁義禮智人性之綱(원형이정천도지상 인의예지인성지강)'이라는

글귀가 쓰인 액자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쓰신 서예 작품 중 하나로, 내가 교장으로 발령 나면서 걸어 놓은 것입니다.

이 글귀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아버지의 힘찬 붓놀림과 선학 같았던 자태가 먼저 떠오릅니다.

  뒷부분에 '仁義禮智人性之綱'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仁義禮智'를 사람 사는 근본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선생이 되어 40여 년 동안 교육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仁義禮智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구나.'하며 꾸짖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 가르침처럼 살아야 하는 건데…….'

하면서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仁義禮智'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전의 아버지는 사람 사는 근본을 지키려고 노력하신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녹색으로 짙어가는 들판을 보면서,

논두렁 아래 물길에서 낡은 발동기를 돌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아버지의 모습도, 통통거리는 발동기 소리도 추억의 저편에 있지만…….

  어언 반세기도 더 넘은 일이었지만, 나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배양구지에 정착하면서 농사꾼으로 시작했지만, 땅을 갈거나 파는 일보다 물 대는 발동기를 다루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 일로 면사무소 출입하는 날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품앗이로 남의 집 일을 갈 때도 아버지는 못줄을 잡아주는 정도였으니,

말이 농사꾼이지 마음씨 좋은 이장님이라고나 할까?

  마을 일도 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여기저기 출입하며 해결도 해주곤 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인근에는 아버지의 서예 솜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며,

한학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어 학자라 이름 불리기도 했습니다.

  면내에 초상이라도 나면 만장의 글씨는 아버지 몫이었으며 멀리 읍내에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널찍한 비단 자락에 커다란 붓을 내두르며

글씨를 써 내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으쓱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밭 서너 마지기를 남겨놓고 그 동안 지어오던 논을 모두 팔게 되었습니다.

아마 농사꾼으로서의 아버지의 적성과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오랜 고심 끝에 내렸던 결정인 것 같습니다.

그 일 이후 5.16이라는 뜻하지 않던 국가적 변혁이 도래하면서 우리 집의 가계 운영은 큰 전환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워진 살림 속에서 아버지는 마을 일, 농협 일,

문중 일 등을 병행하면서도 결코 손에서 붓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서른도 채 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서예와 한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인근 고을이 떠들썩하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는데,

아마 아버지가 그 재능을 물려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내 어린 눈으로 보아도 손재주가 범상치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비록 힘으로 버티는 농사일로는 전문 농사꾼을 따르지 못했으나, 집안에서 살림 도구를 직접 만든다든지

집을 고치는 일 등에서 지혜로움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합니다.

젊었던 시절 아버지는 머리가 좋고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재능과 배움에 대한 갈망은 해방과 6.25라는 시대적 상황과

봉건적인 가정환경 속에 고스란히 묻혀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유달리 자식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가정 형편이라는 장벽이 만만치 않아 아버지의 고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학비를 생각하면 나를 고등학교에 진학시킨 것도 대책 없는 무리수였으며,

결국 고심 끝에 공업고등학교를 선택한 것 역시 취직의 확률을 고려한 현실적 대안이었습니다.

  수업료 내는 날이 가까워오면 내 학비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지인이나 농협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 했지만,

그 조차 녹록치 않을 때면 몇 달이고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농협에서 보낸 독촉장이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나는 그걸 만지작거리는 아버지의 말없는 모습을 뒤로하고 빈손으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전주행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드러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그제야 헤아려지며 가슴이 절로 저며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와중에도 큰 아들인 나의 진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의 결단으로 교육대학을 입학하게 된 나는 선생이 되어 다소나마 집안의 생계를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영리하고 똑똑했던 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줄 수 없었던 아버지는 두고두고 이를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버지가 한창 서예에 몰두 할 무렵 우리 집은 비좁은 방이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서예 연습실로 사용했습니다.

말이 서예 연습실이지 즐비한 잡동사니 살림을 이리저리 밀치면 아버지의 문방사우를 겨우 펼쳐놓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구차하기 짝이 없는 연습실이었습니다.

마음껏 펼치고 싶었던 재능의 발목을 잡고 있던 환경이 원망스러웠겠지만,

아버지가 이를 드러내놓고 탓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헌 목재와 합판을 구해다 서너 날 걸려서 손수 서탁(書卓)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흔들거리고 허름했지만 아버지는 그것조차 즐거우셔서 며칠 동안 한껏 신바람을 내시며 연습했습니다.

큰아들 된 도리로 당시에 제대로 된 서탁 하나쯤 마련해 드렸으면, 오늘에 와서 후회가 덜 되었을 텐데…….

  아버지는 회갑을 전후하여 향교의 강사로도 활동하고,

전국적인 서예전에 출품하여 연속 입상하면서부터 소천(小川)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년 후에 드디어 추천작가 대열에 오르면서 이제 아버지의 서예가 날개를 다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향년 예순여덟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식들도 모두 제자리를 잡아 걱정이 없었으며, 그 동안 닦은 서예가의 능력을 마음껏 펴실 즈음에 아버지는 가셨습니다.

꿈을 펼치지 못하고 가셨으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좀 더 오래 붙잡지 못한 게 참으로 원통합니다.

 잠시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생전에 써 주신 '진솔(眞率)'이라 글씨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인정이 메마를지언정 작은 일도 소중하게 여기며, 진실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아버지가 내려 주신 가훈처럼, 진솔하게…….

                                                  ≡ 2009년 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