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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어머니는 드시기도 전에 배부르다 하십니다.

        어머니는 드시기도 전에 배부르다 하십니다.  

 

 - 예전에 어머니는 -

우리 어머니는 유달리 인정이 많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또한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용하면서도 강하신 성품으로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치도록 힘겨운 가난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무엇보다 다섯 남매를 흐트러짐 없이 성장시킨 것이 그 증표 중의 하나입니다.

  예전에 같은 마을에서 동고동락 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집 이야기가 나오면,

무에서 유를 만든 집안이라고 칭송하면서, 그 중심에 있던 어머니의 힘들었던 삶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모내기철엔 모쟁이 일도 거들고 어른들 틈에 끼어 못밥도 먹어봤습니다,

여름방학 때엔 아버지를 따라 논두렁을 돌며 드넓은 우리 논을 마냥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추수철엔 땅거미가 질 때까지 아슬아슬할 정도로 나락 가리를 높이 쌓은 뒤에야

봉밥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의 생명 줄이나 다름없었던 논을 처분한 뒤부터 상황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남은 서너 마지기의 밭뙈기를 긁어 대며,

일곱 식구를 이끌다시피 했습니다.

주무실 때를 제외하곤 일 바지 차림에 호미와 머릿수건은 어머니의 필수품처럼 늘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은 너나없이 가난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았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모든 것들을 소리 없이 삭이며 누구보다 강하게 감당했습니다.

  겨울이 가까워 오면 무엇보다 땔감이 걱정이었습니다. 

밭에서 나오는 보릿짚만으로 겨울을 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집 겨우살이 준비의 첫 번째 일은 땔감을 장만하는 일이었습니다.

인심 좋은 이웃들이 방아를 찧고 난 뒤에 거저 주는 맵저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한겨울을 춥지 않게 지내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방앗간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마니가 터지도록 맵저를 담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 가마니라도 더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 쉴 새 없이 담아 날랐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머리로 이어 나르는 걸 보면서, 그 작은 머리와 가느다란 목에서 그런 힘이 어떻게 나올까 하고 의아했었는데,

그 힘의 원천이 어머니의 가슴 속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여남은 번을 나르고서야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떨며 그 연약한 허리를 폈습니다.

어머니의 힘겨운 노력으로 부엌 한켠에 수북이 쌓인 맵저 더미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겨울 밤을 오그리지 않고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도 우리 집의 형편은 여전히 궁색했으며

어머니의 고생도 이 무렵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기다 나의 학비 마련 때문에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 집에 들르던 나는 어머니의 지치고 고달픈 일상을 먼저 보아야만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처음으로 집에 왔던 어느 날,

나는 멀건 김치죽을 반도 먹지 못한 채 수저를 놓고 뒤뜰로 나가 한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흐렸던 적이 있습니다.

고생스런 흔적이 역력했지만,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던 어머니가 너무 안 되어 보였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드시지 않고도 배부르다 했으며, 엷은 옷에도 따습다 했습니다.

단칸방에 일곱 식구가 이불 하나로 버티던 겨울밤엔 윗목에 누워서도 견딜만하다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려운 시절을 이렇듯 소리 없이 그러나 강하게 견뎌내셨습니다.


 - 지금도 어머니는 -

  어머니가 아파트에 혼자 기거하신 지도 5년이 다 되어갑니다.

비록 같은 시내여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여든다섯의 연세인지라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뵈올 때마다 고령답지 않은 건강하신 모습으로 '난 이게 좋다'하시는 말씀에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오히려 자식 건강을 먼저 챙기는 걸 보면 우리 어머니는 천생 자상한 어머니입니다.

  통화할 때마다 어머니의 첫 마디는

  "몸은 괜찮냐? 감기 조심혀라."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이만큼 키워 주셨는데도, 어머니 눈에는 내가 여전히 챙겨야 할 대상입니다.

엊그제도 전화가 왔습니다.

  "여그 김치 담아 놓았응게, 얼름 와서 각고 가거라."

  김치도 김치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보고 싶다는 우회적인 신호이기도 합니다.

김치 통에 때깔 좋은 것만 골라서 그득 담아놓고 기다리는 동안 어느 샌가 저녁밥도 지어놓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손맛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 표 반찬들이 자그마한 밥상을 그득 채웠습니다.

  어머니의 거동이나 솜씨는 도무지 연세답지 않아 자식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내심 부러워합니다.

인근의 동생 가게 뒤편에 빈 땅이 오십여 평 있는데, 그 곳이 요즘 어머니의 개인 농장이자 소일거리입니다.

비록 좁고 메마른 땅이지만 고추를 비롯하여 상추, 파 등의 채소들이

요모조모 구색을 갖추어 자라고 있는데, 그게 다 어머니 솜씨입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걸 보면 농사 솜씨는 아직도 빛이 바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 몸부림을 쳤던 밭뙈기가 지겹지도 않는 가 봅니다.    

엊그제는 하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열두시가 훌쩍 넘었더랍니다.

대낮같이 밝은 가로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몸에 밴 부지런함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산된 채소는 모두 자식들의 먹을거리가 되고, 이웃과 나누는 인정이 됩니다.    

 

어머니는 유달리 이웃과의 유대가 돈독합니다. 어느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어머니의 인정과 배려심 때문입니다.

배양구지 마을 떠난 지가 20년이 다 되었는데도, 그곳에는 여전히 친구가 많습니다.

말이 친구지 열 살 이상씩 덜 된 분들입니다. 한번 들르시면 2,3일씩 묵기도 하십니다.

왜 우리 집은 안 들르느냐고 불평을 하면 마음 약한 우리 어머니는 뿌리치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불평마저 정겨워 하십니다.

  전주에 사는 동생의 아파트에 사시면서 5년여 동안 우리 집안의 막내인 손녀를 돌보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그 곳 역시 친구가 적지 않습니다. 전화가 빗발치며 보고 싶다 하면 또 다녀오시곤 합니다.

물론 지금 사시는 아파트에도 연하의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머니는 사람이 따르는 보이지 않는 마력이 있습니다.

인정 많은 마음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20년 연하의 이웃들과도 스스럼없이 통하는 대화,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과 건강이 그 비결일 것입니다.

  시사와 연예에도 밝아 어떤 때는 나도 처음 듣는 최근 소식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어머니를 인기스타라 부릅니다.

내 사촌들이 모이는 계를 하는 날이면, 좌상인 우리 어머니의 인기는 단연 으뜸입니다.

가깝고 멀고를 불문하고 사소한 일까지 정겹게 챙기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거기다 농담도 척척 받아 넘기며 술도 몇 잔씩은 받을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중심이며 기둥으로 아직도 건재하십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마음이 든든하고 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라고 어찌 자식들에게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그걸 드러내면 자식들의 마음에 짐이 될까 봐, 안으로만 말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헤아림의 부족함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늘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어머니한테 들러 저녁 밥상을 받고 왔습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챙기시느라 냉장고 문을 몇 번이고 여닫습니다.

여닫는 횟수만큼 어머니의 정이 묻어나옵니다. 깻잎절임, 게장, 김칫국, 멸치볶음…….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뜨끈한 된장찌개가 마지막으로 상에 올랐습니다.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을 내 앞으로 옮기는 건 오늘도 여전하십니다.

오늘은 밥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반찬도 골고루 많이 먹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에 답하는 일입니다.

따끈한 밥과 맛있는 반찬에 어머니의 사랑까지 호복이 곁들이니 어찌 배부르지 않을까요.

어머니도 밥 한 그릇 국 한 사발을 말끔히 비우시는 걸 보니, 많이 즐거우신 가 봅니다.

  아무래도 이 저녁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음식이 아니라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아내가 살갑지 못한 나를 대신해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가야 한다는 핑계로 따라 나오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습니다.

백미러에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갑니다. 불현듯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머니! 이 밤도 편히 주무시고 건강하세요.

                                                                          * 2009. 5. 31 *

 

 (요즘 우리 어머니, 노익장으로 활동 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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