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자 눈높이 맞추기
나이를 먹다보면 자식들은 하나둘 결혼하여 살림을 차리게 되고,
그들도 자식을 낳아 부모에게 손자나 손녀를 안겨주는 게 사람 사는 순리입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친구나 선배가 손자 이야기를 하면 남의 일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우리 부부도 외손자를 맡아 기르게 되었으니 할아버지가 된 게 실감이 납니다. 맏딸 내외의 맞벌이를 돕는 일인데다, 내 핏줄을 안는 일인데 그걸 마다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부부는 같은 또래에 비해 자식들이 많은 편이라 아이 기르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 있었습니다. 말이 경력이지 연년생인 첫째와 둘째를 포함해 네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 아내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연년생을 키울 때의 일입니다. 한밤중에 아기가 보채며 울기라도 하면 아내는 슬며시 마루로 나가 아기를 달랜 후에야 들어오곤 했습니다. 행여 내가 잠이라도 설치게 되면 다음 날 학교 수업이 힘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아기 기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지금도 그 이야기를 재미삼아 합니다. 당시 아내는 연년생을 키우면서 깊은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내에게만 떠맡기고 나는 편안한 잠을 잤을 터이니, 요즘 세상 같으면 어느 누가 이를 용인하겠는가?
어쨌든 외손자를 맡아 기르면서부터 집안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다시 아기 소리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막내를 끝으로 아기 기른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내의 아기 다루는 솜씨와 정성은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때맞춰 우유를 먹이며 잠을 재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상황에 따라 기분을 맞춰주는 솜씨 또한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도와준다고 나서지만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기 돌보기는 아내에 비하면 어설프기만 했습니다.
나는 퇴근 후나 휴일에 짬을 내어 주로 외손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의 방법에만 의존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갖은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정한 아기 돌보기의 기본 방향은 '외손자 눈높이 맞추기'였습니다.
눈높이가 다르면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아기는 나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말을 아기답게 하기 위해 말 높이를 외손자에게 맞추었습니다. 말투는 아기처럼 하되 가능한 한 웃는 얼굴을 지었으며,
행동은 더없이 유치하게 하고 필요할 때는 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외손자를 데리고 외출하는 날은 어김없이 카메라를 챙겨 순간순간의 요모조모를 포착하여 카메라에 담아두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지치지도 않는지 방방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절로 활기가 솟았습니다.
방 안에서도 노는 모습을 비롯하여 밥 먹는 모습, 잠자는 모습, 웃는 모습, 심지어는 우는 모습까지도 사진으로 찍어 두었습니다.
이 사진들을 정리하여 인터넷 미니홈피에 올려두고 우리 가족들끼리 가끔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수원에 사는 딸 내외가 아들의 달라지는 모습을 수시로 접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처음으로 장난감 총을 하나 사주었더니, 이 방 저 방 쏘다니며 총싸움을 청하기에 그 모습을 재빨리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컴퓨터에 옮겨 그 즈음 유행하던 '곤드레만드레'라는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았습니다. 그리고 '샘골의 총잡이'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럴 듯한 동영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미니홈피에 올려 두었더니 딸 내외와 이모들의 심심풀이가 되었음은 물론, 주인공인 외손자도 컴퓨터 앞에 앉아 '곤드레만드레' 보여 달라며 보챘습니다.
외손자의 눈높이 맞추기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그 동영상은 하도 여러 차례 보아서 물건이라면 닳고 닳아 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아들딸을 기를 때에도 자주 사진을 찍어 현상소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리 아들딸은 필름이 든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사진을 들여다보았고, 외손자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와 미니홈피에 올려놓고 본다는 것입니다. 아기 돌보기에도 최신 정보통신 기술이 사용되다니, 육아 문화도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합니다.
아기는 때가 되면 동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림책을 보며 이야기를 해주면 참 좋아합니다. 소위 내 식의 동화구연은 이야기의 내용을 엄청 부풀려 본디보다 늘이되 오버액션을 가미하는 수법인데, 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외손자의 표정을 살피며 내용을 재미있게 각색하다보면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또 해줘요.'를 연발하면서 간혹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동화의 맛을 알았는지, 컴퓨터를 켜면 슬그머니 무릎 위에 앉아 치근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세월 따라 동화 들려주는 방법이나 아기들의 기호도 많이 달라졌으니, 아기를 제대로 돌보려면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손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 아이들 어릴 때의 모습이 자주 오버랩 되어 다가섭니다.
그럴 때마다 좀 더 따뜻하고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되어 성장한 자식들과 아내에게 미안함이 많습니다. 첫돌이 지나고 발걸음을 떼면서부터 우리 부부에게 맡겨진 이후로 2년 정도 보살핀 외손자가 지난 1월 다섯 살이 되면서 어미 품으로 회귀했습니다.
우윳병을 물고 뒤뚱거리며 나돌아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뛰어다니며 곧잘 심부름도 하게 되었으니 참 많이 자란 것 같습니다. 요즘도 가끔 외손자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꽤 정이 들은 모양입니다.
기르는 동안 때로는 힘겹기도 했지만 아기 하나로 집안에 생기가 돌고 사람 사는 맛을 다시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쓸데없는 기우일는지 모르지만, 외손자의 먼 미래를 상상해봅니다. 외손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 지,
환경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 지 외손자는 어디에 어떻게 서 있을 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운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감안해보면 외손자가 내 나이쯤 되어서 어떤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요즘은 기후가 순리를 벗어나 돌변하거나 환경이 예전 같지 않게 망가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 사는 정이 갈수록 삭막해지는 것도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양상들이 앞으로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며칠 전에 친구와 손자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농담 삼아 던져 보았습니다. "장차 크게 달라진 세상에 성인이 되어 서 있을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찔해질 때가 있다네." 친구는 나의 쓸데없는 걱정을 탓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과학 기술이 그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 했습니다. 나도 그 의견을 수긍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인간의 깨우침과 과학 기술의 경이로운 힘이 중병을 앓고 있는 자연도, 메말라가는 인정도 되살릴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라는 바람으로…….
우리 외손자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2008년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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