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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아내에게서 나를 보다.

                     나에게서 아내를 봅니다.


아내는 나와 가족을 지탱해주는 기둥입니다. 과거에도 그랬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러나 예전에는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으며, 이제야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결혼을 통해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나 생전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가정을 이루고 요모조모 맞추어 살며,

예술 작품을 창조하듯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결혼 생활을 종합예술이라고 말했나 봅니다.

 

  우리의 경우는 결혼을 통해서 사랑을 만들어 온 부부이며, 그 한 편에 아내가 있습니다.

내 나이 이십대를 넘어서 서른을 코앞에 두었을 때,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는데, 1년 후에 그 교장 선생님이 장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직업적 인연으로 아내를 만나게 되었으며, 이 인연이 운명이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더니,

바로 그 셋째 딸인 아내는 예쁘고 복스런 모습으로 다가와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엔 다들 그랬던 시절이지만, 우리도 신혼을 비좁은 셋방살이로 시작했습니다.

  신혼 초 3년 동안엔 일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내는 별 내색 없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몇 푼 안 되는 봉급을 요리조리 쪼개 맞추며 곗돈을 붓고 통장을 늘이면서 내일의 희망을 키워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시부모의 가계까지 챙기며,

나의 걱정을 덜어 준 것은 두고두고 고마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연년생인 첫째 딸과 둘째 딸을 기를 땐 아내의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으며,

주인 집 마당의 빨랫줄엔 늘 우리 아이들의 기저귀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마을 몰랭이의 좁아터진 셋방에서 연년생을 돌보며 남편 뒷바라지에 시달리던 일들이 아내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께서 신혼살림도 보실 겸 우리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장관 부인감이라 불리었다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아내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셨던 모양입니다.

이를 눈치 챈 아내는 오히려 밝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 주며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 드렸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기라도 할 때면, 첫째 딸은 업고 둘째는 안은 채 만원 버스 안에서 부대끼며

병원으로 내달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한밤중에 보채기라도 하면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 달랜 후에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행여 설친 잠 때문에 다음날 학교생활이 힘들까 봐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내에게만 맡기고 나는 편한 잠을 잤을 터이니, 요즘 세상 같으면 누기 이를 용인 하겠는가?

어쨌든 나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학교 출근을 핑계로 그 무거운 짐들을 아내에게 떠넘기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또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내는 당차고 부지런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여립니다.     

어느 날인가 집안 일로 말다툼을 하던 중에 내가 좀 심하게 몰아붙였던지 아내가 말문을 닫고 눈물을 보였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과도한 표현으로 착한 아내의 심정을 건드렸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도 살갑게 달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시간을 끌다가 결국 아내가 속 좁은 나를 놀리며 웃어 주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거의 빈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음과 신뢰라는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일의 희망을 안고 꿈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희망의 중심에는 부지런하고 검소한 아내가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나는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철따라 옷차림의 구색을 맞추었지만, 아내는 변변한 외출복 한 벌 없이 사철을 버티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기회를 보아 쓸만한 옷이라도 한 벌 사주겠노라 하면,

이 옷 저 옷 매만지다 말거나 내 옷이나 아이들 옷만 사고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 얼마나 좋은 옷 입을 일이 생긴다고……."

  아내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나는 매달 한번씩 얄팍한 봉급봉투를 삐죽이 내밀며 할 일을 다 한 양 오만을 떨었고,

아내는 그 오만을 웃음으로 받아 넘겼습니다.

  이렇듯 알뜰하고 절약하는 아내의 노력으로 우리는 결혼 9년 만에 시내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집에서 가족 친지들을 초청하여 부모님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치러냈으며,

다음 해에는 누나 셋을 둔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 기억이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인 줄 알면서도 입 밖에 드러내지 못한 말이 '사랑합니다.'라는 한 마디입니다.

마음은 있어도 이를 나타내지 못하였으니, 매정하고 차디찬 사람으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연로하시면서부터는

여느 집처럼 우리 집도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큰며느리인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두고, 시장 구경을 겸하여 일부러 아내의 도우미를 자청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나는 아이들 현장학습 하듯 장보기를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어느 주부나 그러하겠지만 아내의 장보기는 우리 집의 맞춤형 경제 활동의 하나입니다.

싱싱하고 좋은 물건이 나오는 날을 절묘하게 택일하는 것은 오랜 경험의 산물이었습니다.

또한 사야 할 것을 미리 구상하고 메모하는 것은 장에 나가기 전의 기본적인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콩나물 한 움큼도 결코 그냥 사는 법이 없었습니다.

맘에 든다 싶은 가게 앞에 발길을 멈추면 콩나물대가리며 줄기를 꼼꼼히 살펴보고 난 뒤에야 구매를 결정했습니다.

콩나물 한 움큼에도 최선을 다하는 아내의 모습은 알뜰함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값을 흥정하고 거기다 덤을 받아내고서야 콩나물은 우리 것이 되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난 대충 좀 하라고 불평도 해보았지만,

장보기가 진행되는 반나절 내내 아내의 알뜰한 경제 활동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대충 보고 사는 나의 구매 스타일과는 차원이 다른 아내의 모습을 보니,

집안일을 닭 물 먹듯 건성으로 행하는 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아내의 진두지휘로 동서끼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요모조모 구색을 맞춘 음식을 만드는 모습은 참 보기 좋은 그림입니다. 오고가는 여자들만의 잔재미가 쌓이고 넘치면 이내 웃음소리가 되어 방 안을 그득 채우기도 합니다.

두 다리 쭉 뻗고 잡담을 나누던 나를 포함한 남자들은 번듯하게 차린 상을 받고 나서야 수고했다고 찬사를 합니다.

  맛있게 먹는 것이 음식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해 버리지만,

사실 총감독인 아내에게 엄청 고맙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속마음입니다.

북적거리던 명절이 지나고 가족들과 아이들이 모두 떠난 뒤끝에 파김치가 되어버린 아내는 보기에도 안쓰럽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내가 뭐 도와줄 것 있으면 말해요."

  나는 이 한마디로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무거운 목기상자도 다시 들여 넣고 청소기로 이 방 저 방 밀고 다니지만 사실 겸연쩍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과 오순도순 얘기하며 정을 키워가는 것도 아내의 몫입니다.

아내는 출가한 세 딸을 만나는 날이면 친구처럼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이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막내아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애틋함을 놓지 못합니다.

특히 아들의 군 입대 시 강원도 화천에 있는 부대까지 동행했다가 혼자 남겨놓고 되돌아섰던 일은 지금도 가끔 이야기합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만 보았던 강추위 속의 최전방에서 고생했던 군 생활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합니다.

이렇듯 아내의 따뜻한 사랑의 힘으로 아이들은 착하고 야무지게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아내는 나의 무심함을 메우느라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내가 좀더 자상했더라면 아내의 어깨가 한결 가벼웠을 텐데…….

  오늘도 저녁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커피 한 잔으로 숨을 돌리며 하루 일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가는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마음이 짠해집니다.


  40여 년간의 교직 생활을 순탄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아내의 소리 없는 내조가 컸음은 물론입니다.

정년퇴임을 앞둔 요즘은 만감이 교차되지만. 교단을 내려오는 종착역에 아내가

박수를 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은빛 계절이 오면 아내가 지금까지처럼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노라고 약속했거든요.

남은 생애엔 그 동안 아내에게 못해준 일들을 챙겨주며 화답하려 합니다.

  얼마 전에 심력 다지기에 관한 연수에 참가했었는데, 강사가 숙제를 하나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씩 써 오라는 데, 나로서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나는 저녁 내내 누구에게 쓸까를 고민하며 뒤척인 끝에 결국 아내에 대해 어설픈 시 한 편을 썼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이 시가 좋은 작품으로 선정되어, 연수생 앞에서 낭독할 때는 쑥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말은 맞지만, 모범적인 시라는 강사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치레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요.'라는 구절을 낭독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얼굴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연수 중에 숙제로 쓴 시라며 슬며시 아내에게 내밀었더니,

그걸 읽은 아내가 빙그레 웃어 주었습니다.

비록 글의 힘을 빌었지만 아내를 만난 후 처음으로 '사랑해요.'라는 말을 담은 시를 바쳤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모양새나 분위기는 영 어설펐지만…….


 * 사랑하는 당신에게 *


 폭우 쏟아지던 날엔

 우산으로

 폭풍 몰아치던 날엔

 바람막이로

 거기 늘 서 있던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햇살 따사롭던 날엔

 여유롭게 마주 보고

 녹음 짙푸른 날엔

 함께 찬미하며

 거기 늘 서 있던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이제는

 잘 자란 아이들에게서

 당신이 보입니다.

 이만큼 서 있는 나에게서도

 당신을 봅니다.


 나는

 그런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여보!

 사랑해요.


                                                                                      ≡ 2008년 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