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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등하굣길을 다시 가다.

                   등하굣길을 다시 가다. 


                                                                                         ≡ 2007년 가을 ≡

어머니께서는 요즘도 가끔 배양구지에 들러서 옛날 이웃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때로는 인정 많은 사람들에 손길에 이끌려 하룻밤 주무시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인 30여 년 동안을 정붙이며 살았던 마을인지라 그 곳 사람들이 지금도 참 편하신 가 봅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배양구지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에,

국민학교 시절 아이들로 왁자지껄했던 모정 앞에 잠시 멈춰 어린 시절을 더듬었습니다.

그 곳은 우리 마을 아이들이 등교하기에 앞서 모두 모이는 곳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많이 서린 곳이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다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통학반장의 추궁이 대단했습니다.

집에서 학교 갈 준비를 서두르는 것은 부모님의 성화보다 통학반장의 다그침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시 통학반장을 비롯한 6학년 형들의 권위는 마을 이장보다 센 듯 했습니다.

그날 아침도 게으른 아이가 마지막 나오는 것을 끝으로 대열 정비가 완료되면,

통학반장의 구령에 따라 학교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신작로에 들어서자마자 통학반장은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듯, 쉼 없이 구령을 외쳐댔습니다.

  "번호 붙여 갓!"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번호를 붙였습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네     엣!, "

신작로의 갓길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걷는 모습은 군장 대신 책보를 멨을 뿐 군인들의 행렬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6.25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지라 군사 문화가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번호 붙여 걷기로 대열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다음은 군가가 이어졌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시~작!"

통학반장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소리 높여 불러댔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전우의 시체를, 시~작!"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러나 신통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 하면서 입을 잘도 맞추어 불렀습니다.

이웃 마을 통학반을 만나기라도 하면 서로 기죽지 않으려고 목청은 더욱 커지고 발걸음도 씩씩해졌습니다.

이렇게 몇 곡을 반복해서 부르며 걷다보면 아침에 보리밥 몇 숟갈로 채운 배는 금세 허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끔 횟배를 앓는 한 친구는 배를 쓸면서도 목청을 돋우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당시 누구나 뱃속에 기생충을 품지 않고 다니는 아이가 없었으며,

횟배 앓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면 허리에 둘러맨 책보가 느슨해지다 못해 엉덩이에 걸쳐진 아이도 눈에 띱니다.

6학년 형들의 책보는 대부분 어깨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동생들에 비해 책도 몇 권 더 많았겠지만, 도시락을 책 위에 얹은 책보는 길게 늘어뜨려 어깨에 걸치는 게 제격이었습니다.

털털하기로 소문난 정우 형의 책보 겉에 불그레한 물이 배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흔들어 댔는지 책 위에 얹은 도시락 안의 반찬 그릇에서 김칫국물이 넘친 것입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도면 책에도 김치 냄새가 배어 있을 것입니다.

교문에 다다르니 줄을 서지 않고 오는 아이들을 단속하는 주번생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명찰을 달지 않았다든지 단추가 떨어져 복장이 불량한 아이들도 단속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사는 주번생인 6학년 형은 큰 인심이라도 쓰듯 우리 마을 아이들은 그냥 들어가라고 재촉했습니다.

우리들은 일주일 동안 그 형을 든든한 배경으로 여기고 거침없이 교문에 들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굣길은 또래들끼리 어울리게 되어 비교적 여유롭습니다.

신작로 길을 따라 걸을 경우는 도로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이 친구이자 노리개였습니다.

지나는 길에 툭툭 건드리면 코스모스는 허리를 휘청거리듯 춤을 추며 화답합니다.

꽃송이를 하나씩 꺾어 사이사이 꽃잎을 떼어낸 후

하늘을 향해 높이 던지면 빙빙 돌다가 사뿐히 내려앉게 되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잠자리비행기라 불렀습니다. 

이 놀이에 도취한 우리들 때문에, 꺾여진 코스모스 꽃들이 수없이 길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코스모스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꿀벌들이 장난스런 아이들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코스모스 꽃의 꿀맛에 취해 있는 꿀벌들에게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그리고 고무신짝을 벗어 재빠르게 덮어씌워 서너 바퀴를 빙빙 돌리고 난 뒤,

땅바닥에 내려치면 꿀벌은 죽은 듯 기절합니다.

기절한 꿀벌의 꽁무니에서 벌침을 제거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익숙하게 꿀주머니가 꺼내어 꿀맛을 만끽한 우리들의 하굣길은 언제나 바쁠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아침에 모였던 모정 앞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그제야 책보를 고쳐 매고 저마다 자기 집으로 발길을 재촉합니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당시의 시끌벅적했던 그 길은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모정 앞은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초등학생이라야 모두 네댓 명뿐이기 때문에 모일 것도 왁자지껄할 것도 없습니다.

저마다 어른들이 차로 실어다주니 통학반도 없고 통학용 노래도 부를 일이 없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100명은 족히 넘었던 나의 국민학교 시절에 비하면,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 다시 등하굣길에 서니,

그 시절 그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따듯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