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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전반기

'과외방사우'와 함께한 마지막 입시

   「과외방사우(課外房四友)」와 함께한 마지막 입시


교직 생활 두 번째 해인 1969년에 처음으로 6학년을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중학교 진학에 대한 전형 방법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터라,

입학시험이 있는 마지막 해이기도 했습니다.

6학년 담임으로서의 성패는 중학교 합격자 수에 의해 판가름이 나던 때인지라,

거기에 대한 중압감은 일년 내내 어깨를 무겁게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오직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린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온통 담임교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당수는 미리 진학을 포기하든지,

천신만고 끝에 합격을 해도 등록금의 장벽에 막혀 진학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당시 농촌의 실상이었습니다.

입시철이 가까워 오면서 그 준비에 올인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남폿불 몇 개로 밝힌 교실에서

야간 과외공부에 열을 올리던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과외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면 어김없이 길 왼편에 공동묘지가 즐비했던 역재몬당을 넘어가야 했었습니다.

사방이 어둠에 휩싸인 그 곳은 온몸이 오싹하던 공포의 난코스였습니다.

마을이 보이면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어두컴컴한 고샅길로 사라지던 그 시절 친구들도 생각났습니다.

 

어쨌든 내가 6학년 때나 10년 후인 6학년 담임 시절이나, 아이들에게 입학시험은 높고 힘겨운 장벽이었습니다.

새내기 교사였던 나는 젊음과 열정을 무기로 마지막 입시에서

한 명이라도 더 합격시키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을 닦달하며 입시 대비 교육에 열을 올렸습니다.

집에서 통근하는 것도 포기하고 학교 옆의 마을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때로는 휴일에도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들였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학생들을 입시에 합격시키고자 하는 내 지도 방법은 지금 생각하면 극히 단순하고 일방적이었습니다.

과외 지도 경험이 전무 하다시피 했던 나는

많은 시간을 들여 다양한 문제를 풀어보게 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십여 년 전에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었을 때 경험했던 그 야간수업을

선생이 되어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입시라는 명분을 앞세워 교육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과외 학습지를 만드는 줄판을 비롯한 원지, 철필, 등사판은 늘 지근거리에서 나의 '과외방사우(課外房四友)' 노릇을 했으며,

나는 손가락에 옹이가 박힐 정도로 원지를 긁어댔습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야간 과외수업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낮 동안의 수업으로 아이들과 나의 체력은 이미 바닥 난 상태인지라 힘에 겨웠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리밥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를 때운 뒤,

다시 힘을 찾은 아이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보면서 나도 힘을 내어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천정 한가운데에 매달린 희미한 백열등 하나가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교실 안은 입시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학습 분위기가 이완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잡아가지만 밤이 깊어가자,

지친 빛이 역력하고 눈을 비비거나 조는 아이들이 하나 둘 눈에 띠었습니다.

힘겨운 과외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아이들과 나를 짓누르고 있는 입시라는 중압감 때문에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집중력의 흐트러짐이 도를 넘을 시점이면, 수업을 멈추고 아이들을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잠시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잠을 쫓고 난 뒤 다시 수업에 몰입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견디기에는 무리한 한계가 가까워오면, 더 이상 공부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교실 밖에는 끝나는 시각에 맞추어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차림새를 보니 저녁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뒤, 곧바로 아이들을 챙기러 온 모양 같았습니다.

논두렁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들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대충 씻고 나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거의 밤중이 되는 것이 촌부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아이고, 선상님 고상 많이 허시내요."

 "잘 살펴 가세요."

따뜻한 격려의 말과 주고받는 인사로 잠시 소란했던 교실 주변은 아이들이 떠나면서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을 따라 도란도란 정겨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실의 전등불이 꺼지면서 사방은 어둠과 고요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온종일 아이들의 뜀박질과 떠드는 소리로 생기가 돌았던 학교 건물도 묵직한 휴식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제야 엄습해오는 피로로 몸이 천근만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땅히 몸을 씻을 곳조차 없는지라 방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이불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습니다.

 

채 3년도 안 되는 설익은 교단 경험으로,

입시교육은 막고 품는 식의 단순한 방법이 최선일 거라고 합리화 하며 하루를 보낸 것 같았습니다.

입학시험은 모든 교육의 이론과 과정을 한꺼번에 묻어버리는 무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그날 밤 잠자리가 그리 편하지 못했습니다.

 

                                                                                                                    ≡ 1969년 늦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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