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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전반기

어설픈 열정

                 어설픈 열정


  모교인 영원국민학교에서 처음으로 6학년을 맡게 되었습니다.

6학년 담임은 내가 바라던 터라 학년 초부터 학생 교육은 물론 학급 경영을 의욕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맡겨준 업무도 군말 없이 척척 처리하는 걸 보고, 한 선배교사는 나에게 아이디어뱅크라는 별명도 붙여주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칭찬이었지만, 그것 또한 동력이 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데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10여 년 전 6학년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방식을

내가 답습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갈등과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달라진 세상과 새로운 아이들에 걸맞게

새로운 방법의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나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선배 선생님들에게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학급에 뒤지지 않으려고 교실 환경 꾸미기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매월 월례행사처럼 실시하는 환경심사와 그 결과에 따라 매기는 순위에 지나칠 정도로 매달렸습니다.

심사를 하루 이틀 앞두고는 다른 교실을 기웃거려, 괜찮다 싶으면 그걸 모방하여 내 교실을 꾸미곤 했습니다.

 ꡐ창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ꡑ라 했으니, 그리 흉이 될 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교실 벽에 이것저것 붙이고, 진열대를 공작품으로 가득 채워놓아도 무언가 부족해보였습니다.

  환경심사 결과를 보면 일등은 항상 대선배 선생님의 차지였습니다.

그 선생님의 교실 바닥은 티끌하나 없이 반들반들했으며,

교실 안에 놓여진 어느 물건 하나 소홀함이 없이 온갖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작품판에 붙인 그림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반듯했습니다.

교실 환경이 선생님의 오랜 경륜에서 우러난 깔끔한 용모와

단아한 말씨하고 꼭 닮았다는 다른 선생님들의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일등 교실처럼 꾸미려면 먼저 나 자신의 심신을 단정하고 곱게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풋내기 교사로서는 그게 그리 쉽게 될 리가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행사가 또 한 가지 있었으니, 일제고사라는 이름의 시험이 그것이었습니다.

일제고사 날이 가까워오면 학급마다 비상사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닦달하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책이 두려워 싫든 좋든 책이나 문제지를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먼저 눈에 띠는 것 중의 하나는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이 뜸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이 코앞인데 놀 생각이 나니?'

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여간 통 큰 아이들이 아니면 운동장에 나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일제고사를 보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학급 순위를 발표하고, 일등 학급은 시상을 했습니다.

일정한 점수 이상의 학생에게는 상장과 함께 '우수상'이라 새겨진 별 모양의 증표도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나도 젊음을 무기로 욕심을 부리며, 성적이 공부의 모든 것인 양 시험 점수를 향해 아이들을 밀어붙였습니다.

매달 한 차례씩 이런 홍역을 치루다 보면 시험에 대한 압박감이 적지 않았으나, 성적은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열정을 앞세웠던 나는 점수가 오른 아이들이 겪었을 중압감과

순위가 뒤쳐져 있는 아이들의 숨은 좌절감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교육의 또 하나의 축인 생활지도의 방식도 권위적이고 일방적이었으며, 이를 당연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5.16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군사문화의 탓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교사중심의 교육 사조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젊음을 내세워 아이들과 공도 차고 노래도 가르치며 비교적 많은 소통의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전반적인 학교 분위기는 소통과 경청보다 지시와 감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농번기에는 집안의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 조퇴하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6학년의 경우는 집안일을 한몫 단단히 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경험했던 농촌과 학교의 상황이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하교 후에 집에서 스스로 가정학습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시의 사회 상황에 순응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며, 빈 곳을 채워주는 마음의 교육에는 부족함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나의 일방적 교육 태도는 짧은 교육 경력의 탓도 있었지만,

가르치는 일에만 안주하고 스스로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 19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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