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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배양구지 그리고 황새다리

 

     배양구지와 황새다리 이야기


  우리 가족은 정읍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삼십여 년 동안을 백양리에서 살았습니다.

일가친척 한 사람 없었지만 어려운 시절을 정붙이며 살았기에,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고향 마을입니다.

'백양리(白良里)'라는 이름을 글자로 풀이해보면, 마음씨가 곱고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을 이름처럼 한결같이 인정이 많고 알뜰살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면 백양리에 살던 시절의 사람 사는 정이 새삼 그리워지곤 합니다.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물론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백양리보다 '배양구지'라 이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 연유야 어찌 되었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늘 부르다 보니, 입에 익어 맛깔스럽고 정겨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부근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배양구지를 지나는 신작로 일대를 '황새다리'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때로는 '몬당'이란 이름을 혼용하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다들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습니다.

나 역시 본명인 백양리보다 별명인 배양구지와 황새다리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나 면사무소에 내는 서류와 편지봉투의 주소 란에는 어김없이 백양리라고 썼으니,

본명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새다리는 배양구지의 상징이자 심장이며, 인근 마을 간의 경제활동이나 소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 곳에는 꽤 규모가 큰 방앗간을 비롯하여, 간단한 생필품을 파는 점방과 주막이 각각 서너 집씩 있었으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허물없이 들러보는 이발소는 이발과 담소의 공간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런저런 소문의 집결과 확산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낼 조반 먹고 일찌감치 황새다리에서 만나세."

 "이따가 해 저물기 전에 몬당 주막으로 나오게."

  어른들은 대충 이런 식으로 약속하면 만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황새다리는 어른들에게는 만남과 소통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놀이와 설렘의 공간이었습니다.


  농번기에는 좀 뜸했지만, 거의 일년 내내 황새다리는 배양구지와 인근 마을 사람들로 늘 붐볐습니다.

특히 추수가 끝난 후의 황새다리 방앗간 주변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방아 찧는 소리와 드나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참새 떼들도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때를 만난 듯 덩달아 들랑날랑했습니다.

  방아를 다 찧고 나면 쌀가마니의 넘치고 모자람에 관계없이 들르는 곳이 주막이었습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촌부들의 푸짐한 웃음과 이야기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와 신작로까지 번져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 전까지 배양구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황새다리의 이런저런 모습들에 꽤 익숙한 편입니다.

특히 국민학교 시절의 황새다리는 마치 동화 속의 무대처럼 정겹고 아늑한 추억거리를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고 들녘이 한산하던 작년 늦가을 어느 날,

나는 부안읍내에 가는 길에 황새다리에 잠시 멈췄던 일이 있습니다.

특별한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가 황새다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버스 정류장이었던 몬당은 이제 하나 남은 구멍가게만이 붐볐던 옛 모습을 말해주고 있을 뿐,

오가는 사람조차 뜸하고 한적하기 그지없어 애틋함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은 나는 어느새 50여 년 전 열두어 살 때를 반추하고 있었으니,

나이가 들면 과거의 어느 시점이 선명해지며 그 곳을 자연스럽게 더듬게 되나 봅니다.

나는 해질 무렵까지 몬당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내 모습을 선연하게 떠올렸습니다.


  당시 방앗간 마당에는 나락을 실은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드나들었으니 계절은 아마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멀찌감치 가는쟁이 마을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버스가 보이자,

기다리다 지쳐 코를 빠뜨리고 있던 선돌양반네 아이들 남매가 방방 뛰며 손을 흔들어댔습니다.

부안 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린 지가 두어 시간은 족히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정류장에 버스가 서니 부안 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아침에 들고 나섰던 곡식자루와 계란꾸러미 대신 장보따리가 한두 개씩 들려 있었습니다.

선돌양반의 한 손에는 생명태 두어 마리가 축 쳐진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에 쥔 부대종이 봉지에는 아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고무신 두 켤레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은 고무신을 낚아채어 냅다 집으로 달려가고,

선돌양반은 비시시 웃으며 주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에 면사무소에 가신 우리 아버지도 그림자를 길게 끌며 황새다리에 나타났습니다.

빙긋이 웃으시며 내게 건네준 제법 묵직한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둘둘 말은 부대종이의 한쪽이 촉촉이 젖어 찢어진 사이로 빨간 고기 살찜이 삐져나온 걸 보니, 돼지고기가 분명했습니다.

  황새다리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즈음,

사람들도 하나 둘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배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출출하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집으로 내달리는 동안 아직 끓이지도 않은 돼지고기 냄새가 코끝을 구수하게 간질였습니다.

뜨끈한 두부 조각이 뻘건 국물을 뒤집어 쓴 채 부글부글 끓는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여섯 식구는 오랜만에 돼지고기 국으로 포식하며 배들 두드렸습니다.

아마 지난 추석 이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그 시절 배양구지와 배양구지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절로 따뜻해집니다.


                                                                                                   ≡ 2008년 늦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