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떼와의 전쟁
벼이삭이 나온 후부터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 참새 떼는 들녘의 불청객으로 농부들을 괴롭힙니다.
참새들은 이리저리 떼로 몰려다니며,
어린 벼이삭을 닥치는 대로 빨아먹어 채 여물지도 않은 벼를 쭉정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무렵 논에 나가 참새와의 일전을 벌이는 일은 농부들의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논은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이웃 마을을 지나야 갈 수 있는 좀 먼 곳에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의 며칠 동안은 거의 매일 들에 나가서 새를 쫓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아침 식전의 새 쫓기는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매일 아침 내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삽을 메고 들로 나가시곤 했습니다.
얄밉게 부지런한 참새 떼를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아침밥을 먹은 뒤에야 아버지를 따라 논에 나가곤 했지만,
아버지께서 마을 일로 면사무소에 가시는 날의 새 쫓는 일은 하루 종일 내 몫이 되었습니다.
참새 때들이 얄밉기는 했지만,
익어가는 벼이삭들로 가득 찬 우리 논배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힘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약삭빠른 참새들은 이 쪽 논배미에서 쫓겨나면 반대 쪽 논배미에 앉아 주인을 농락했습니다.
"우여! 우여!"
이 논 저 논에서 외쳐대는 새 쫓는 소리가 서로 교차되면서,
우리 논에서 쫓겨난 참새 떼들은 이웃 논으로 날아가 앉기도 했습니다.
또 거기에서 쫓겨난 참새 떼들은 우리 논으로 다시 날아와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도망가지 않으면 팡개가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팡개는 대나무 토막의 끝을 십자로 쪼개어 그 사이에 논두렁의 흙을 찍어 멀리 던져 참새를 쫓는 데 쓰였습니다.
이 도구는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어 새 쫓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팡개에서 쏘아대는 흙 탄환을 맛보고서야 좀 뜸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해진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어디선가 참새 떼들이 또다시 나타났습니다.
"한눈팔지 말고 새 잘 봐라."
하며,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도 귀에 쟁쟁했습니다.
나는 또다시 논두렁을 몇 바퀴씩 돌며 참새 떼와의 전쟁을 치러 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논은 넓고 벼이삭은 저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제 놈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
참새 떼에 시달려 지친 나를 논두렁에 세워놓은 우산 밑으로 유인하는데 이보다 좋은 핑계거리는 없었습니다.
헌 우산 그늘은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그늘이었습니다. 집
에서 출발할 때 들고 나온 주전자의 물은 미지근해진지 한참 지났지만,
들판에서 갈증을 해소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그늘 속으로 들어가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따가운 햇살 사이로 간간이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나도 한참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참새가 몇 마리씩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우리 논에는 머무르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한참을 쉰 뒤에야 다시 힘을 내어 참새 떼를 쫓아 논두렁을 달리다 물뱀을 만나 기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놈 때문에 저 건너 있는 참새 떼 쫓기를 포기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참새 떼가 물러가고 좀 한가하다 싶으면 알이 토실토실 밴 메뚜기 사냥으로 무료함을 달래보기도 했습니다.
방아깨비도 잡아 구워 먹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렁이가 자라서 된 것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곧이들은 나는 방아 찧기 놀이로 만족하고 말았습니다.
어느덧 해거름 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참새 떼의 습격이 멈출 때쯤에 맞춰 나의 참새 쫓기도 끝이 났습니다.
고무신을 질질 끌며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집집마다 굴뚝 연기가 피워 오르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새끼 고상 많았네. 쪼끔만 지달러라. 곧 밥 챙겨 주께."
밭에서 금방 들어오신 어머니께서는 머리에 얹은 수건을 벗어 탈탈 털며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때맞춰 들어온 동생들에 이어 면사무소에 가셨던 아버지도 헛기침을 하시며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이쯤해서 우리 집은 하루의 피로를 떨어내고, 어느 새 정겨운 기운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 1959년 늦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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