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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연둣빛

아버지의 무게를 처음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무게를 처음 알았습니다.


                                                                                                               ≡1958 가을 ≡

가을 해가 서산에 가까워지면 하굣길의 우리들 그림자도 괴물처럼 길게 늘어집니다.

신작로 주변의 밭에서는 종일 캐 놓은 고구마를 담느라 농부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입니다.

나는 해가 뉘엿뉘엿해서야 신발을 질질 끌며 집에 들어섰습니다.

늘어지는 것은 힘들고 배가 고프다는 나의 신호입니다.

어머니는 그 때까지 마당 한켠에서 고구마를 갈무리할 수숫대 통가리를 엮고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가 하실 일입니다.

 “이제 오니?”

 “응.”

책보를 마루에 내던지고 쪼그리고 앉은 나는 어머니의 서툰 솜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어머니의 말에는 힘이 없었으며 얼굴엔 심란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아버지가 화호병원에 입원했단다. 수술했어.” 

아버지의 느닷없는 입원과 수술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멍했습니다.

요 며칠 동안 감기로 기침이 잦은 듯 했만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병원도 흔하지 않아 웬만한 병은 버티기 일쑤였는데, 입원이라니….

거기다 수술까지 했다니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어린 나로서는 입원과 수술은 죽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이웃에 사는 아저씨한테 주사를 맞는 중에

그만 주사바늘이 빠지면서 그것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 무렵에는 면소재지에 자그마한 의원이 하나 있어,

시골 사람들의 병 치료에 요긴한 역할을 했으며,급박할 때는 왕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게 아프지 않으면 견디거나 담방약으로 해결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또한 시골 마을엔 의사나 약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쯤은 있던 터라

급할 때는 그 분들의 서툰 기술도 요긴하게 쓰이곤 했습니다.

마을 어른들께서 서둘러 아버지를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갈 정도면 위급한 상황임에 틀립없습니다.

참으로 희한하고 황당한 일이 우리 아버지한테서 일어난 것입니다.

마을에서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별일이 없을 거라며 위로를 해주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위기 상황이 우리집을 감쌌습니다.

 

서둘러 저녁상을 챙겨주신 어머니께서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나와 동생을 부탁하고 막차로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들 형제는 텅 빈 집을 지키며 가슴을 졸였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우선 급한 대로 수술을 했지만, 몸 안에 있는 바늘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근심스런 것은 바늘이 몸 안에서 옮겨 다니다가 만일 핏줄 속에라도 들어가면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두 번째의 수술이 중대한 고비가 된다하니 참으로 가슴을 칠 일입니다.  

 

밤이면 여섯 식구가 다닥다닥 몸을 붙여야 누워 잘 수 있었던 우리 방이 그 날 밤처럼 넓어 보인 것은 처음입니다.

찬 바람이 감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텅 빈 자리를 보면서 우리 어린 형제들은 밤이 깊도록 몸을 뒤척였습니다.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라 한들 어찌 마음 편히 잠이 들 수 있었을까?

다음 날 한숨을 돌리게 하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우리 가족을 뒤덮고 있었던 먹구름이 서서이 걷히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바늘이 핏줄로 들어가지 않고 허벅지 부근에 머물러 있는 것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맘씨 좋은 우리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을 돌본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슴 철렁했던 그 일로 인해 아버지의 소중한 무게를 난생 처음 몸으로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