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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연둣빛

그 시절 달밤지기가 되고 싶습니다.

                그 시절 달밤지기가 되고 싶습니다.


                                                   ≡1958년 가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동녘 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얼굴을 내밉니다.

저녁 식사를 서둘러 마친 마을 사람들은 달오름에 맞춰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구 밖 모정 마당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모정 옆 텃논에는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누런 벼들이 고개를 숙인 채 온몸에 밤이슬을 적시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곳에 나와 꼭 무엇을 하기로 한 것은 아니지만,

달이 부르는 손짓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서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아이들 소리가 점점 커지면 방구석에 박혀 있던 게으른 아이들마저도 이내 방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어른들도 질세라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점잖게 뒷짐을 진 분,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분,

담배를 푹푹 빠시는 분, 지나는 길에 괜히 아이들을 툭툭 치는 분 등…….

 나오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듯 어른들이 오늘밤에 펼칠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가 자못 궁금해집니다.

 

 달이 점차 오르면서 아이들의 수도 따라서 늘어갑니다. 모정 주변은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른들이 이야기에 방해가 된다고 성화를 낼 즈음이 되자, 아이들은 고샅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몰려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어디서 났는지 막대기 하나씩을 들고 칼싸움 놀이부터 시작합니다.

두 편으로 나뉜 아이들은 대장의 지시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기합 소리를 지르며 야무지게 내려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힘없이 나동그라지다가 금새 일어나는 아이도 눈에 띕니다.

  마당이 넓은 집에서는 마을 처녀들의 강강술래가 흥겹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낙들은 마루에 걸터앉아 처녀들과 달을 번갈아 가며 바라봅니다.

  휘영청 밝은 달은 마을 위로 하얀 달빛을 쉼 없이 쏟아냅니다.

칼싸움을 끝낸 아이들은 한동안 원숭이놀이를 벌입니다.

웬만큼 넓은 마당만 있으면 되는지라 마땅한 놀이가 없을 경우에 쉽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술래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날쌘 동작으로 몸을 피하고,

술래는 아이들을 부지런히 쫓아가 몸에 손을 대면 술래가 바뀝니다.

몸이 기민하지 못한 아이가 연이어 술래가 되다 보면 모두들 싫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쯤 해서 아이들은 마을 가운데 토담을 중심 삼아 숨바꼭질을 시작합니다.

술래가 약속한 수를 셀 동안 아이들은 달빛을 등지고 이 구석 저 구석에 재주껏 몸을 숨깁니다.

  장독대 뒤에 숨다가 간장 독 뚜껑을 떨어뜨리는 아이, 짚가리 속에 파묻히는 아이, 옥수숫대 뒤에 숨는 아이,

재소쿠리를 뒤집어쓰는 아이, 심지어는 자기 집 방안으로 숨어버리는 아이 등

숨는 방법도 천태만상이지만 찾아내고야 마는 술래의 재주 또한 용합니다.

그러나 유난히 숨는 데 재주가 있는 아이는 몇 번을 반복해도 술래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달이 중천에 가까워지자, 다음날 논일을 해야 하는 어른들이 먼저 잠자리를 찾아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숨바꼭질이야 다른 놀이에 비해 시끌벅적한 놀이가 아닌지라

아이들이 이 놀이를 시작하면서 소란스러움은 한결 잦아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술래가 있는 곳 주변에만 숨던 아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몸을 숨기는 범위가 점점 넓어집니다.

술래는 힘겹게 아이들을 찾아내지만 밤인지라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달이 중천에 이르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아이가 하나 둘 늘어납니다.

이 아이들은 숨는 채 하면서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습니다.

놀기도 지치고 때맞춰 잠이 슬슬 찾아올 만도 합니다. 그렇지만 몇 아이들은 끈질기게 숨바꼭질을 이어갑니다.

떠드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른이 참다못해 대문 밖에 나와 호통을 칩니다.

 때서야 나머지 아이들도 할 수 없다는 듯 제 집을 찾아갑니다.

  마지막 아이가 사라진 고샅은 이내 고요함이 흐릅니다. 

중천에 매달린 달은 눈부신 빛을 초가지붕 위에 호복하게 쏟아놓습니다.

고이 잠든 아이들도 달처럼 풍성한 꿈에 젖습니다. 마을은 평화로움 속에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시절 그 마을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그 밤의 달밤지기가 되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