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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연둣빛

야학방의 냄비꼭지

            야학방의 냄비꼭지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친 마을 아낙들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토방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탈탈 털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습니다.

 "아이고 추워. 이 놈의 강치 때문에 지 독아지 다 얼어 튀겄네. 진지들 잡수었능기요?"

 "공부허로 오능가? 어서 들어오기여."

  아낙들이 이런 식으로 대충 인기척 겸 인사를 하면, 방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듣고 정겨운 답례를 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우리 집 문간방에서 야학이 열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어른들이 대부분인지라

문맹을 벗어나는 것이 당면 문제였습니다.

특히 아낙들은 대부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문맹의 정도가 심각했습니다.

당장 눈앞의 허기를 면하는 것이 우선인지라 까짓 글자 좀 모르는 것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즈음 같은 마을에 사는 고등학생 두어 명이 방학을 이용하여 문맹 퇴치의 기치를 내걸고 나섰습니다.

말하자면 신문명의 선구자였습니다.

  야학방은 비록 좁고 묵은 냄새가 풀풀 났지만, 미리 군불을 넉넉하게 지펴서 그런지 방바닥은 제법 따끈따끈했습니다.

벽에 걸린 어른 등짝만한 칠판 옆에 남포등이 켜지면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호기심으로 문밖에서 기웃거리다가 야학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 주인 아들이라는 특별 배려로 청강생이 된 셈이었습니다.

 "가마니, 거머리, 나비, ……."

  선생님이 된 형들이 선창을 하면, 아낙들은 학생이 되어 신바람을 내며 따라 읽었습니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킥킥거리는 아낙도 있었습니다. 어색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나봅니다.

  그러던 중‘거머리’를 따라 읽던 아낙들이 한 사람을 쳐다보며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낙들 중에 택호가 거머리 댁이 있었던 것이 그리도 우스웠던지 한동안 공부 의 진행이 안 되었습니다.

야학 선생님은 나중에서야 이유를 알아차리고 비시시 웃더니만 서둘러 다른 낱말 공부로 옮겼습니다.

  방 안은 배움의 열기로 제법 따끈했지만, 마당엔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실 한글 공부보다 주산 시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주산 시간이 되자, 나도 큼직한 나무 주판을 옆구리에 낀 채 방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엔 간단한 암산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낙들의 수준을 배려해서인지 한 자리수를 느릿느릿 부르고 난 후, 손을 들게 하고 지명을 했습니다.

아낙들 중 반 정도만 손을 들었고 나머지는 머리만 긁적였습니다.

속도를 붙여 부를수록 거수하는 이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셈에 익숙하지 못해 더듬거리는 것이 당연하련만, 내 어린 마음에는 조금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끔 해봤기에 이 정도의 암산은 수월했던 터라, 나로서는 손쉽게 맞힐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나를 향해 여기저기서 탄성과 박수를 보낼 때마다 좀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주산 과정으로 넘어가서도 암산과 같은 현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산 역시 학교에서 조금은 배운 터라 초반에는 선생님이 부르는 덧셈의 답은 손쉽게 맞혔습니다.

러나 후반에 들어 속도를 붙이면서부터 눈에 띠게 더듬거리던 나는 대충 주판알 튕기는 시늉만 했습니다.

  "……, 24전이오, 48전이면?"

  선생님이 마지막 수를 불렀지만, 답을 말하겠다고 선뜻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대충 손가락 시늉만 했던 나는 이미 계산의 혼돈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판 놓기를 포기한 채 온통 시선을 나한테 돌린 야학생들의 압력 때문에 나는 억지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답이 맞았을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정답이라는 판정이 내렸고, 야학생들의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야! 정주댁 큰 아들 갱근이는 냄비꼭지네."

  마지막 답을 맞히는 순간 선생님의 야릇한 미소가 흐르자,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지만, 냄비꼭지가 최고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철없이 우쭐댔습니다.


  나는 그때의 웃음과 박수의 의미를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았습니다.

답의 맞고 틀림에 관계없이 박수를 쳐서 나의 기를 살리려는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어쨌든 그 때의 분에 넘친 응원 덕분에 주산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중학교에서도 주산부에 들어갔고,

그 후에도 꽤 괜찮은 주산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가끔은 어릴 때'야학방의 칭찬'이 떠올려지곤 합니다.

  '야학 선생님, 감사합니다! 야학방 학생들도요.'


                                  ≡ 1957년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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