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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청록빛

혼돈스러웠던 고교 시절

     혼돈스러웠던 고교 시절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만 해도 우리 집은 논 대여섯 마지기를 지으며 그런대로 일곱 식구의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농사에 체질이 맞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서는 마을 일과 서예에 더 애착을 보였습니다.

 농촌에 사는 분답지 않게 깔끔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학과 서예는 인근에서 꽤 소문이 나 있어 일로 인해 바깥출입이 잦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께서는 고심 끝에 논을 처분하게 되었으나, 5.16 이라는 뜻밖의 변혁기가 도래하면서 아버지의 구상은 큰 혼선을 빚게 되었습니다.

소위 고리채 정리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우리 집 가계 운영은 직격탄을 맞게 되었으며, 그 후로 우리 집은 논 없는 농촌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가정 형편으로는 나의 고등학교 진학은 생각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힘겨웠던 중에도

어떻게든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모님의 신념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명문고로 알려진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를 마신 나는,

후기 고등학교로 천주교 재단에서 설립한 해성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을 배워두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당시의 사회적 풍조와

외국인이 직접 기술 교육을 담당한다는 것 등이 아버지의 마음을 끌었던 것 같았습니다.

사실 나의 공업고등학교 진학은 무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정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특히 기술이라는 것은 내 적성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러나 당시의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한 아버지의 결정으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신설학교인지라 학생수 40명에 당연히 1학년뿐이었으니, 학교의 환경 등 모든 것이 단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외국인 기술교사가 직접 가르치며 최신 실습 시설을 갖춘 신설 공업고등학교라는 소문 때문에

입학하기 전부터 꽤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입학해보니 일반기계과 등 세 개 학과가 있으나, 실습 시설이 열약하여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만 스위스인 교사가 기술 관련 교과를 직접 지도한다는 것과

차별화된 베레모 모자에 특이한 모양의 교복이 다른 고등학생들의 이목을 끄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로서는,

기술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에게 기술을 직접 배운다는 자부심만은 대단했습니다.

 학년 초만 해도 외국인 교사가 도면을 그리며 독일어로 설명하고

담임교사가 이를 통역하는 이색적인 수업에 학생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실습 시간에도 외국인 선생님이 항상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자랑거리였습니다.

잘 되면 기술도 습득하고 외국에도 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애초부터 쇠를 자르고 다듬는 일에는 도무지 재주도 흥미도 없어

실습 시간만 되면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공업 기술과 관련이 깊은 수학을 비롯하여

화학, 물리 교과는 따라가기가 벅찼습니다.

오히려 인문학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나로서는 잘못된 선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터에 1학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업고등학교로서의 시설 부족과 교사진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인문학교로의 전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2학년이 되자, 소문대로 인문학교로 탈바꿈 하면서

문패도 해성고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미리 준비라도 해놓았다는 듯이

곧바로 모든 것이 인문계 고등학교처럼 대학 입시 체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실 1학년 동안에 몇 차례의 설계나 실습을 통해서

공업고등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껴왔던 나로서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교육수요자인 학생들은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바뀐 충격에도

마치 모두 바라기라도 했다는 듯이 별 동요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진로가 바뀌는 중대한 변화였는데도 순조롭게 적응해가는 것 같았습니다.

교육과정이 입시 위주로 바뀌고 우수한 교사가 보강되면서

잘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져

오히려 전입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시스템이 바뀌면서 인문 교과에 취미가 있었던 나는

공부에 어느 정도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어와 국어는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친구의 공부를 도와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어쨌든 내 고등학교 생활은 이래저래 순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반은 기술 교육이라는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으며,

후반은 정반대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혼돈의 시절이었습니다.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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