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다니기 바빴던 신혼 생활
읍내 구미동의 셋방에서 출발한 내 신혼 생활은 겨우 3개월 만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출퇴근하기 가깝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도 그리 멀지 않으니,
신태인으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충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분가 후 첫 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태인 생활 반년 만에 아내가 부득이 직장을 그만 두게 되어,
구태여 신태인에 살면서 버스 통근을 해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이사한 곳이 학교 옆의 성동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동은 시골인지라 신혼 생활의 살림을 풀어놓을 마땅한 셋방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겨우 방을 구해놓고 보니, 참으로 비좁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집 주인인 마음씨 좋은 노인 부부 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안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결혼할 때 마련해온 장롱은 제 짝을 맞추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게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방이 비좁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가구들은 어떻게 들여놓아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마루도 없는 데다 머리를 숙여야 방에 들어갈 수 있으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신혼인데 객지 생활을 이렇게 궁색하기 시작하려니 무엇보다 아내에게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한 지 며칠 후에 장모님께서 오셨는데,
우리가 사는 방을 보시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걸 보았을 때는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나의 두 번째 이사를 보시고서,
"언젠가 점을 쳐보니, 네 평생에 스물두 번 이사를 한 다더니 그 말이 맞을랑갑다."
라고 진반농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 중에도 우리의 신혼생활은 보통사람들처럼 새 설계의 부푼 꿈을 가꾸며 아기자기했습니다.
나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가슴 부푼 신혼의 희망을 재산 삼아 열심히 살아보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해에 내가 살던 성동 마을에 국가의 새마을 사업 지원을 받은 시범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 마을로 이사 온지 1년 만에 새 집의 방 하나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두 번째 이사를 하게 된 셈입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방도 넓고 깨끗해 불편한 점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거기다 인정 많은 할머니와 손자만이 사는 집이라 마음이 한결 편하고 여유로웠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연탄보일러가 고장을 일으켜 속을 태우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거기다 관리가 서툰 탓인지 연탄불까지 자주 꺼져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연탄불을 살리기 위해 주인이 깰 새라 조심조심 옮겨 다니며 부치고 불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이것도 쏘시개가 준비되었을 때 이야기지, 그것조차 없을 때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결에 눈을 떠보니 아이들이 바짝 오그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또 연탄불이 꺼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나는 마당 한 구석에 장작개비와 솔가지를 섞어 쌓아 놓은 나무더미를 생각해냈습니다.
거기다 솔방울이 듬성듬성 달려 있어 쏘시개로 쓰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나는 마당으로 살금살금 나가서 그걸 몇 움큼 빼왔습니다.
우선 추위는 면해야겠고 밤중인지라 주인을 깨울 수도 없었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짧게 꺾은 솔가지와 솔방울을 아궁이에 쑤셔 넣고 연기를 뒤집어쓰며 연탄불을 살려냈습니다.
솔방울이 몇 개씩 달린 묵은 솔가지는 연탄불 살리기에는 제법 효험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때로는 투덜거리며 때로는 키득거리며
부엌에서 한밤중을 시달린 덕에 다행히 아이들은 편한 잠 잘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더 있었으나,
다음 날에도 그 후에도 할머니한테 쏘시개의 무단 사용을 고백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꺼림칙했습니다.
맘씨 좋은 할머니는,
‘아이고 선상님, 아무 걱정 말고 얼마든지 갖다 쓰구려.’
라고, 하셨을 터인데…….
이렇듯 불안정한 셋방살이 신혼 생활 중에도 나는 큰 재산을 얻었으니, 예쁜 두 딸이 그들입니다.
그래서 성동 마을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1977년-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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