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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청록빛

부끄러운 자화상

      부끄러운 자화상


겨울이면 눈 오는 날이 그저 좋기만 했던 어린 시절,

사나흘씩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이면 마을 청년들이 모두 나와 작대기 한 개씩을 챙겨들고

이 마을 저 마을 건너다니며 꿩 몰이를 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면 나는 토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었습니다.

청년들에게 몰리다 지친 꿩이 우리 집 앞 눈 더미에 쳐 박히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장끼 한 마리 내 손에 묵직하게 들어보리라.'

그러나 그것은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의 한낱 환상이었습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러간 여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어렸을 때의 환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때마침 빈 트럭 한대가 자갈길을 덜커덩거리며 나를 추월하는 순간,

길옆의 밭둑에서 갑자기 꿩 한 쌍이 푸드덕거리더니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아마 금슬 좋은 꿩 부부가 한가로이 먹이를 찾던 중, 난데없는 굉음에 지레 겁을 먹은 듯 합니다.

앞서 날던 까투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서 길 건너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뒤따르던 장끼가 그만 도로변의 전봇대에 부딪쳐 내 앞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성질이 급하기로 소문난 꿩인지라 몇 번 파닥거리더니 금세 몸을 늘어뜨렸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재빨리 자전거를 도로변에 받친 나는 이미 숨이 넘어간 그 놈을 잽싸게 집어 들었습니다.

마침 주위에 오가는 차나 사람도 없는 데다, 코앞에 떨어진 횡재인지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나의 이기심은 그 놈을 먹을거리로 생각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꿩 몰이를 보면서 내 손에 딱 한번만 들어보고 싶었던 그 작은 소망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묵직한 촉감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까투리는 장 서방의 운명도 모른 채 이미 밭둑 저 쪽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홀로 남은 까투리가 어찌 되었는지 가련하고 궁금하지만 알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 놈이 유심하다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 때문에 좌충우돌하다

허무하게 횡사한 장 서방의 영령을 찾아 해매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들을 무척이나 원망하면서…….

그 놈 덕분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포식을 했지만,

장끼의 운명도 모른 채 홀로 살아남아 있을 까투리가 자꾸 아른거려 측은한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꿩은 까치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동심을 불러오기에 부족함이 없는 동물 중의 하나입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멀리서 날아가는 꿩을 발견하게 되면,

 "꿩꿩 장 서방 무얼 먹고 사니?"

하며, 마치 친구를 대하듯 그 꿩을 향해 몇 번이고 소리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정말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르륵, 꼬옥……."소리 내어 대답을 했습니다.

 "앞집에서 콩 한 조각, 뒷집에서 콩 한 조각 그럭저 럭 먹고살지."

이렇듯 아이들이 이어 받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꿩과 아이들은 이미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횡재한 꿩을 안고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도취되어 있었던 나는,

이기적인 현대인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날 그 길에서 나동라진 그 꿩을 떠올리면, 하찮았던 욕심에 절로 부끄러워집니다,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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