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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청록빛

대학생활의 그림자

       대학생활의 그림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진로 문제로 적잖이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학원 문턱조차 가보지 않았던 나는 모의고사에서 영어 시험만은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진학할 것을 권했지만,

그 무렵 나는 대학 가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라는 현실적 장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촌에 살면서도 마땅한 농사 수입조차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나의 진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장고 끝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 교육대학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교육대학은 수업료가 파격적으로 낮을 뿐 아니라 수업연한이 짧았으며, 거기다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이 가능했었습니다.

가정 형편과 자식 교육의 열망 사이에서 고심했던 아버지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대학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의 성품을 가장 잘 아는 아버지께서는 일찍부터 나에게는 교사가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전주에 사시던 고모님께서는, 나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할 테니 걱정 말라며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드렸습니다.

셋방살이로 힘겨운 가운데에도 중고등학교 시절 나를 자식처럼 대해주셨던 고모님은 부모님과 다름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나의 진로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맡긴 나는 대학에 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대학 진학을 대책 없는 무모한 도전으로 보았지만,

다행히 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밭뙈기 서너 마지기로 다섯 남매를 키우기에도 힘에 부친 상황에서 대학생을 두게 된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다소는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타고난 학문적인 기질과 교육에 대한 선구적인 혜안이 아니었다면 대학 진학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상한 대로 학비 마련은 부모님의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등록금 납입 시기가 되면 아버지는 돈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학자금 대출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면 대학생활을 허투루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부모님은, 나 때문에 드리워졌을지도 모를 동생들의 그늘을 생각하면서

애틋함에 가슴이 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아무런 내색 없이 힘겨움을 안으로 삭여가며, 나를 다독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고모님의 가족들이

나를 편하게 해주며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 역할을 해준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에게 대학 생활의 낭만은 애초부터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흔한 서클도 남의 일로 여기며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짬이 생기면 음악실에 들러 오르간을 연습하거나, 탁구장에서 친구들과 탁구를 즐기는 정도였습니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시장에서 구입한 중고 교복과 재건복 상의 한 벌을 번갈아 입으며 교문을 드나들었습니다.

  닳고 닳아서 뒤꿈치가 터진 운동화를 눌러 신은 채 4킬로미터 남짓한 통학 길을 걷는 것도 내 일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엔 멋스런 파격으로 운동화 뒤꿈치를 눌러 신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유달리 길었던 나의 방치된 장발도 결코 유행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께서 전주에 오셨습니다.

늘 그러하시듯 아버지께서는 별 말씀 없이 양복점으로  들어가시더니 바지 하나를 맞춰 주셨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날마다 같은 바지만 입고 다니는 아들이 안 되어 보였던 가 봅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양복점에 들어가 보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낡은 바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날 여윈 어깨가 유난히 굽어보였던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울먹였습니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아직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호강이라 여기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순으로 발령이 날 것이라는 말에, 졸업하자마자 발령을 받아야겠다고 작심을 해서인지 졸업 성적도 괜찮게 받았습니다.

  어쨌든 나는‘첫해 입학과 다음해 졸업’이라는 2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는 유일한 월급쟁이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계에도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1966-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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