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지휘가 빛났던 이유
2년 전에 근무했던 자그마한 시골 초등학교의 학예 발표회가 열리는 날, 특별 초대를 받고 교문에 들어섰습니다.
이 학교는 40명 남짓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소규모 학교로
내가 평교사로서의 마지막 2년 동안을 몸담았던 학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과의 사연도 각별하며, 교직원들과 쌓은 정도 유별났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그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그 때 가르치던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인지
학교의 빨간 벽이 보이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앞 다투어 농촌을 탈출하듯 도시로 나가버린 사람들 대열에 끼지 않고,
이 사정 저 사정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 아이들의 부모들이었습니다.
내가 가르쳤던 당시의 2학년 아이들은 모두 열 명이었습니다.
이 열 명의 아이들이 열 손가락처럼 다정하게 지내다가 한 아이가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된 날,
마치 손가락 하나를 잃은 듯 슬퍼했던 아이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에서 한 아이가 새로 전학을 와 열 손가락을 다시 채우게 되었을 때,
너무 좋아서 펄쩍 펄쩍 뛰던 아이들. 바로 그 아이들을 그날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 내 모습을 발견한 그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성큼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가슴이 찡해왔습니다. 나는 그들과 낱낱이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열명 중 절반이 떠나고 지금은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니, 그것이 또 마음을 허전하게 했습니다.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는 학예 발표회장에 들어섰습니다.
발표회장이라야 교실 두 개 사이의 칸막이를 떼어내어 마련했으니, 비좁고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고향처럼 오붓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아이들을 유달리 사랑했던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40여년 교직 생활의 마감을 겨우 두 달 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은 1학년 아이의 첫인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노래, 연극, 동화, 연주, 무용, 수화 등이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펼치는 꾸밈없고 즐거운 모습들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분에 넘치는 화려한 무대나 분장은 때로는 거추장스런 오만으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 아이들에게 순박한 모습을 감추려는 채색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서가 바뀔 때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박수와 웃음소리도 그치지 않습니다.
간간이 깜짝 출연하듯 아장거리며 무대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기들이 양념처럼 색다른 맛을 돋우며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출연하는 아이들조차 때로는 자기 흥에 겨워 각본에도 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지도교사의 익숙한 반주와 한 아이의 조금은 어설픈 지휘에 맞추어 전교생의 합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지휘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2학년 때 우리 반이었던 준이였습니다.
준이는 아기였을 때 겪은 병치레 때문에 지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로 성장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준이의 준비물이나 숙제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준이는 나를 무척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걸핏하면 다툼질을 하고 팔다리와 얼굴은 생채기로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등교할 때 말끔하게 차려 입은 옷은 한나절이 가기도 전에 흙으로 얼룩지기 일쑤였습니다.
나와 아이들은 준이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숙제도 준이의 몫은 따로 마련했습니다.
공부 시간에 조 편성을 할 경우에도 준이가 어렵지 않게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놀이 시간에도 아이들이 앞장서서 준이를 챙겼습니다.
그 뒤로 준이를 대해주는 아이들의 태도가 바뀌어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심성이 들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 준이가 오늘 전교생 합창의 지휘봉을 쥐고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교생을 지휘하는 의젓한 모습은 예전의 준이가 아니었습니다.
합창이 진행되는 동안 코끝 찡한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간간이 지휘와 노래가 엇나가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준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준이를 그 자리에 서게 한 젊은 선생님은 내가 1년 동안에도 하지 못했던 일을 불과 십여 일만에 해낸 것입니다.
나의 밀린 숙제를 도와 준 젊은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준이는 학교생활에 더 많은 자신감을 가질 터이고,
다른 아이들도 준이를 전교생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날 아이들의 들꽃 같은 소박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공연을 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가슴 속에 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발표회장을 나서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습니다.
≡ 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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