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인사기록카드’ 이야기
이것은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시종일관 나를 따라다니는 유일한 문서입니다.
겉모양새는 비록 하찮아 보이지만, 공무원으로서의 내 신상에 변동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간결하고 정확하게 한 줄 한 줄 기록해온 내 교단생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문서는 A4 두 장 정도 크기에 불과하며, 무게는 20그램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작고 가벼운 이 문서가 나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주 귀한 것이지만, 나 아닌 다른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깨끗하고 반듯했었는데, 연륜이 쌓이면서 빛이 바래고 구김살도 늘어갔습니다.
마치 주인인 나처럼 말입니다. 나를 닮은 이 문서는 다름 아닌 나의 '공무원인사기록카드'입니다.
1968년 3월 교사로서 첫 학교에 부임하는 날, 내 손에 들린 노란 봉투 안에는
난생 처음 받아 본 발령장과 ‘공무원인사기록카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한 종이일 거라는 짐작만 했지, 그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학교에 들어섰습니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오늘,
공무원으로서의 경력들이 쌓여가면서 빈 칸들을 빼곡히 채운 인사기록카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인사기록카드에는 주로 개인의 인사에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선생으로서의 나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비록 누렇게 퇴색한 채 흘러온 세월만큼 닳고 닳아 가벼워진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삶의 무게가 누적되어서인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게 인사기록카드입니다.
첫머리에 붙은 증명사진은 새내기 교사 시절의 내 모습이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풋풋한 얼굴에 까만 눈썹, 꽉 다문 입, 포마드를 넉넉히 발라 곱게 빗은 머릿결…….
내가 인사기록카드를 가끔 들여다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사진을 통해 젊은 시절을 반추해보기 위함입니다.
경력 란의 첫 줄에는 공무원으로서 첫 날의 기록으로 '1968년 3월 1일.
정읍신풍국민학교 근무를 명함. 29호봉.'이라는 글씨가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날 아침 어설픈 양복 차림으로 낯선 교무실에 어정쩡하게 들어섰을 나,
선생으로서의 첫 단추는 제대로 꿰었을까? 첫 수업은 어떠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지긋이 미소 지어 봅니다.
세월이 흐르고 경력이 한 줄 한 줄 더해질 때마다, 나와 함께 한 아이들의 수도 늘어 갔을 것입니다.
처음에 인사기록카드 양식을 제작한 사람은 이 정도면 퇴임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칸과 줄을 만들었을 텐데,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쓸 여백이 바닥나 부전지를 붙여서 누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걸 들여다보면서 나의 교직생활의 총량이 기준량을 초과했던지,
아니면 제작자의 예측력이 부족했던지 둘 중에 하나일 거라는 우스개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묵을수록 그윽한 맛을 내는 장맛처럼, 요즘 내 빛바랜 인사기록카드는 그 낡은 냄새조차 향기롭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단순하고 사무적인 문서에 불과했으나, 요즘은 무엇보다 소중한 문서로 승격되어 애착이 많이 갑니다.
사람들은 오래되고 귀한 물건이 있으면 이를 가보로 여기며,
깊은 곳에 가두어 놓고 행여 손상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관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내 인사기록카드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 내내 지척에 두고 언제나 필요하면 보거나 만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옮길 때마다 어김없이 내 짐 보따리의 한 구석에 끼어서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가정에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모임에서의 나, 사회에서의 나…….
그리고 나를 지탱해주는 주변의 자연이나 크고 작은 물건들…….
생각해보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 인사기록카드도 그 소중한 존재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내 인사기록카드도 마지막 남은 한 줄만 기록하면 할 일을 다 합니다.
'마지막 한 줄은 내 손으로 쓸까 합니다. '정년퇴임으로 교단을 내려오다.'라고…….
누군가 '행복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가진 걸 사랑하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경륜과 지혜가 묻어나는 말입니다.
가진 걸 사랑하라는 말은 아마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저런 연유로 내 인사기록카드의 빛바랜 모습은 물론 닳거나 해어진 구석까지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누가 뭐래도, 나의 은백색 머릿결과 주름진 얼굴도 더 소중하게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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