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동행
외환위기의 후유증으로 인한 그늘이 남아 있었던 2000년,
나는 전교생이 마흔 명 남짓 되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농촌은 이농현상이 지속되면서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로 북적거렸을 운동장은 조용하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당시 농촌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초등학교 운동장과 교실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전학 가는 아이들이 생길 때마다 빈 책상을 치우면서 애달파 했습니다.
그리고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남아있는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허탈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새 학년이 되어서 처음 교실에 들어서던 날이었습니다.
나를 맞이해주던 우리 반 열 명의 아이들은 비록 단출하지만 오붓했습니다.
마치 열 개의 손가락을 함께 펴고 오므리듯 도란도란 정겨운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실 한쪽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언제 누구네 집이 살던 마을을 떠나 전학을 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명선이가 부모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하게 됨으로써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가까스로 유지되던 열 명이 무너지던 날,
아이들은 제 몸의 손가락 하나를 잃은 것처럼 아픈 치레를 하며 잠시도 명선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곰 인형을 건네는 아이, 필통 깊숙이 아껴두었던 싸인 펜을 선물하는 아이,
꼬깃꼬깃 접은 편지글을 전하는 아이……. 아이들의 이별 의식은 소박했지만 진지했습니다.
명선이를 교문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던 아이들의 모습은 텅 빈 운동장처럼 휑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짝꿍이던 선민이가 명선이 사진이 붙은 사물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어깨를 토닥거리며 달래보았지만, 열 개의 손가락 중 하나를 잃은 아이들의 아픔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생각엔 소중한 것들이 참으로 많은 곳이 시골이라고 생각해.
학교엔 모든 선생님들이 모두 담임선생님처럼 하루에도 몇 번 씩 이름을 불러 주고,
수없이 눈길을 마주쳐 주시잖니?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있지.
언제든지 부르면 금방 나오는 친구도 있고……."
아이들이 내 말에 동감해주며 마음 추스르기를 바랐으나, 지금 심정은 그게 아니라는 듯 표정이 영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우리 반이 열 명을 채우지 못한 채로 두 달 여가 지난 어느 날,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 왔습니다. 경기도에서 진이라는 아이가 전학을 온 것입니다.
교실은 일순간에 활기가 돌았습니다. 다시 완전한 열 개의 손가락을 갖추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저마다 환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걸 보니, 새로 온 진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오래토록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의 별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할머니 댁에 맡겨졌으니, 언젠가는 무모 곁으로 돌아가야 할 아이였지만…….
두 아이의 엇갈린 행보는 왜소해지는 농촌학교의 실상이자, 당시 흔들리던 농촌 생활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명선이네는 희망의 파랑새를 찾아 도시로 떠났지만,
반대로 진이네는 날려버린 파랑새를 원망하며 농촌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십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명선이네는 희망의 파랑새를 만나 안정된 생활 터전을 잡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진이는 다시 부모 품으로 되돌아가 날려 보낸 파랑새를 되찾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애틋함으로 가슴이 찡해 옵니다.
≡ 2000년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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