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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문화를 만나다.

       길거리에서 문화를 만나다.

 

<첫째날>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영원길거리문화제'

이 가을의 끝자락에 고향 영원의 길거리에서 특별한 문화를 만났습니다.

듣기에도 생소한 길거리문화제가 과연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그 안에 무엇들이 담기게 되는 것인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제에 작품이나 얼굴을 드러내는 영원사람들 중에는 익히 아는 이도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먹고 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영원은 나의 잔뼈가 굵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은선리에 접어드니 ‘영원작가님들을 환영합니다.’라 쓰인 현수막이 나의 기대를 더욱 부풀게 합니다.

소재지에 들어서니 노랗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메타스퀘어 가로수가 장관을 이루며 성큼 다가섭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가로수 행렬, 그 사이로 누워 있는 좁다란 도로, 건물과 담장 사이로 나 있는 잘 다듬어진 인도,

그리고 정겨운 이웃처럼 모여 있는 기관들이 길거리문화제의 열린 마당이었습니다.

영원 소재지 전체가 문화제 공간인 셈입니다.

여느 문화제나 축제처럼 넘치는 인파, 밀리는 차량, 시끌벅적한 잡상인 등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행사 본부에 들러 지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 뒤, 특별한 문화제 들러보기를 시작했습니다.

후배님의 맛깔스런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풍물놀이 등 영원 사람들의 다채로운 공연이 흥을 돋우었습니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마당 한켠에 전시되어 있는 목공예, 돌조각, 지팡이, 분재 등도 둘러보았습니다.

집 안에 갇혀 있던 작품들이 처음으로 나들이 나온 듯 한켠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영원인이 애지중지하며 손때를 묻혀온 지팡이들은 참으로 이색적이며 특별한 전시물입니다.

배양구지 선배님은 그 많은 목공예품을 언제 어디서 모아, 이제야 사람들 앞에 내놓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행사장을 둘러보며 간간이 선후배와 제자들을 만나 나누는 옛 이야기와 고향 이야기는 하나같이 정겹고 따뜻합니다.

면사무소 2층에 마련된 전시장에 들어서니, 한지공예가로 성장한 32년 전의 제자가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제자의 품격있는 한지공예 작품이 전시장 한 가운데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작품마다 정교한 솜씨와 한국적인 자태가 묻어 있었습니다.

정성들여 빚어낸 작품과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한 제자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절로 뿌듯해집니다.

어릴 적엔 이런 재능이 어디에 숨겨져 있었을까? 그 때 나는 선생으로서 이를 알아채기나 했었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했습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으니, 선생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잠시 후에 아버지의 유작인 두 점의 서예 작품 앞에 멈췄습니다.

아버지의 힘찬 서체와 ‘小川 文完植’이라는 함자 밑에 아직도 선명한 낙관을 대하니, 살아계신 듯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주제가 실린 아우의 사진 석 점도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길거리를 둘러 볼 생각으로 전시장을 나오니, 아버지의 자취가 남아있는 '면사무소 신축 기념비'가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영원면청사신축기념비(永元面廳舍新築記念碑)’ 아버지의 힘 있는 필체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듯 합니다.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라 이제 그 솜씨를 더 넓게 펼쳐야 할 무렵에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자식으로서 더 머무시도록 붙들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려옵니다.

길거리에 나서니 담장에는 영원면의 작가들이 가슴으로 쓴 시들이 걸려 있습니다.

한결같이 소박하고 정겨운 주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언제 그런 재능들을 갈고 닦았는지 그저 감동스러울 따름입니다.

국민학교 깨북장구 친구 승철 시인의 시도 한 자리 차지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인 임채림 소설가, 이성재 시인, 송국회 시인의 시도 눈에 들어옵니다.

영원의 사적들을 사진으로 옮겨놓은 전시물을 마주하니, 옛 숨결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 많은 흔적들을 들추어내어 우리 눈앞에 펼쳐놓은 영원인의 집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담벼락에는 영원사람들의 진솔한 모습들이 담긴 작은 사진들이 모여 또 하나의 영원고을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농협의 담벼락과 파출소 마당도 벽화와 전시물로 잠시 점령당했습니다.

소재지 상가의 유리문은 전통한지로 단장하여 멋스럽고 은은한 멋을 자아냅니다.

'영원만의 영원다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둘째 날>

밤사이에 길거리에는 노오란 나뭇잎들이 많이 내려앉았으며, 날씨조차 스산합니다.

이 문외한의 생각으로는 오늘같은 날씨가 문인들의 시낭송을 위해서는 오히려 좋은 날 같습니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임채림 소설가의 사회로 진행되는 둘째 날의 행사는

시인 등 문인들의 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 낭송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잠시 쉬는 틈에 임채림 소설가와 나는 32년 만의 사제간 만남을 가졌습니다.

32년 전엔 나는 교단에 서고 그 아이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내가 좌석에 앉은 채 훌륭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단상에 서 있는 제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기쁨 또한 여간 아닙니다.

소설가로서 그의 재능이 널리 번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기를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제자가 지은 소설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이 순간이 참으로 든든합니다.

오늘 밤엔 텔레비전 조금만 보고 임채림, 아니 정님이 직접 쓴 소설‘무탈이 할매’를 끝까지 읽으려 합니다.

시 낭송에 이어서 펼쳐진 할머니 두 분의 추억의 다듬이질 소리는 정겨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 분들의 모습 위에 집에 계신 어머니께서 잠시 오버랩 되어 다녀가셨습니다.

국악을 비롯하여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의 연주가 분위기를 이어가고 난 뒤,

수염이 허연 여든 다섯 되신 어르신의 시조 한 가락이 장내를 숙연케 합니다.

옛과 오늘이 번갈아 무대에 오르내리면서 오후 한나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훈 써주기를 하는 한 서예가의 붓끝에서는 좋은 글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옵니다.

늦가을 낙엽 지는 길거리에서 마시는 따끈한 전통 차 맛도 일품입니다.

나는 날씨가 차가워졌다는 핑계로 전통 차 코너를 수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도 한 잔 거들었습니다.

조금은 스산한 바람결에 간간이 낙엽을 떨어뜨리는 메타스퀘어 가로수를 등지고 다시 시낭송이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낙엽, 바람결, 움츠림 그리고 시낭송…잘 어울리는 키워드들인 것 같습니다.

영원 작가들의 시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내내 가슴이 훈훈해옵니다.

그들은 청중의 많고 적음에 개의치 않고, 고향의 품이라는 것만으로도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원 출신 가수의 노래가 이어지며 어울림 한판이 벌어졌습니다.

영원 사람들의 막춤도 문화의 한 코드라 할만 합니다.

하루해가 기울어질 무렵에야 초유의 영원길거리문화제는 잔잔한 감등과 아쉬움 속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영원길거리문화제는, 눈과 귀가 즐겁고 배도 부르며, 주인공 따로 관객 따로인 다른 축제나 문화제와는 색깔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비교의 의미가 없는 그런 한마당이었습니다.

주최 측이 표방한 철저하게 '촌티나는', 그래서 더욱 빛나는 이틀간이었습니다.

이 작지만 옹골찬 문화제가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주인공인 영원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에너지가 되기를 기대하며, 가뿐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 2008년 늦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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