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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여름 밤 산책길에

                          여름 밤 산책길에 

     - 출발 ! 천변으로 -

정읍천은 내장산을 비롯한 부근의 높고 낮은 산골짜기를 근원으로 하는 작지만 정겨운 물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동교부터 연지교까지 시내를 흐르는 3킬로미터 정도의 천변은

산책로로써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입니다.

특히 한여름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일찌감치 마친 나는 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정읍천변으로 나섰습니다.

반바지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뿐한 발걸음으로 운동 겸 산책의 시 동을 걸었습니다.

아직 소화가 덜 된 상태라 아랫배는 좀 묵직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습니다.

여름 들어서 매일 밤 한 시간 반 정도 천변 걷기 운동을 계속 하다보니 이제 제법 몸에 익었습니다.

  종일 맹위를 떨치던 침통 더위는 저녁까지도 식을 줄을 모릅니다.

천변에 들어서면 우선 정동교 다리 위에서 내뿜는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전부터 내뿜고 있는 물줄기 아직도 지치지 않고 시원스러운 위용을 자랑합니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수십 개의 물줄기가 다리 난간을 따라 장식된 조명 시설과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화려함을 더합니다.

  다리 아래의 물놀이장에 몸을 담근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뿌려대는 물줄기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더위를 씻고 있습니다.

여름 한 철 정동교 밑은 시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북적이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을 트럭에 싣고 이 곳을 찾아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다가 어둑어둑해서야 돌아가는 촌부들도 눈에 띱니다.

요즘 시골은 예전과 달라 맘 놓고 몸을 담글 수 있는 물놀이 장소가 없는지라,

아이들에게 이보다 실속 있는 피서지는 흔하지 않습니다.


 - 산책로에서 -

  천변은 온통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천태만상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 한가로이 산책하는 사람, 지인들끼리 앉아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

빙 둘러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

  둔치에 발을 디디면 우선 돗자리를 깔고 고기 굽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기를 열심히 굽는 엄마,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빠, 그 옆에서 방방 뛰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가족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입니다.

커다란 고기구이 도구까지 마련하여 모임을 갖는 듯한 한 떼의 젊은이들도 보입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시끌벅적한 모습과 늘어선 술병들을 보니, 오고간 술잔들이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에어컨에 익숙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나 더위를 잊으면서

회포를 푸는 듯하니, 그냥 좋게 보아주어야지요. 뒤처리도 잘 할 사람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하얀 조명이 야외 농구장을 대낮처럼 밝혀줍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윗옷을 벗어버린 채 젊음을 뽐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한밤중까지 농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어

주변에 사는 시민들로부터 원성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젊음은 여간해서는 지치지도 않나 봅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이 시간 부러운 것은 젊음입니다. 젊음은 언제 보아도 힘차고 아름답습니다.

  주차장 한켠에서는 엿장수 부녀가 점박이 얼룩무늬 옷차림으로 장구와 북을 번갈아 치며 손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 부녀는 어젯밤에도 오늘과 같은 자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찾는 사람이 있든 없든 동작과 가위질 소리는 경쾌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북을 치는 여자 아이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움을 자아냅니다.


  - 초산교와 샘골다리 -

  초산교는 정읍천변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정동교 물놀이장과 샘골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곳입니다.

정동교 부근이 동적이라면 초산교 밑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다리 밑에 자리잡은 십여 개의 평상에서는 화투를 치거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입니다.

그 동안 마신 술에 얼큰했는지 몸을 비틀거리며 평상 위에 몸을 부린 사람도 눈에 띱니다.

  한낮의 다리 밑은 노인들로 빈틈이 거의 없었는데, 저녁이 되니 많이들 집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물고기 생태 관찰장은 요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물이 넘쳐 모두 떠내려갔나 봅니다.

물만 넘실거릴 뿐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고객인 아이들의 발길도 뜸합니다.

저만치서 낚시꾼 서너 명이 정읍천에 낚시를 드리운 채 고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녁인지라 찌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 걸 보면 낚시를 꽤나 즐기는 모양입니다.

  샘골 다리에 가까워지자, 천변에서는 생소한 트럼펫 연주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까이 가보니 어스름한 다리 밑 중간쯤에 트럼펫을 불고 있는 한 청년이 보였습니다.

트럼팻 소리는 다리에 공명되어 웅장하게 들립니다.

  청년의 주위로 모인 사람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냅니다.

건너편 둔치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큰 소리로 신청 곡을 외쳐대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나는 곡을 때로는 애절한 곡을 토해내는 이색적인 트럼펫 독주는 지나가는 산책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 반환점을 돌아 -

  샘골 다리를 지나면 출발점인 정동교에서 2,200미터 지점에 내 나름대로 정한 반환점이 있습니다.

 곳을 돌아서 반대편 천변을 따라 걸으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죽림 공원의 인공폭포 아래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폭포 벽에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조명 장치는 야릇하면서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천변의 상층부에 심어놓은 들꽃 중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어렴풋이나마 꽃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시민들을 위해 산야에서 옮겨온 후로 이제 제자리를 잡아 낯이 익은 듯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낮에 이곳을 걷노라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다른 모습의 들꽃 무리들이 나타나 산책객들의 눈을 멈추게 합니다.

잎은 잎대로 꽃은 꽃대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밈없는 모습으로 손짓합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서면 코끝에 와 닿는 풋풋한 내음이 친숙함을 느끼게 합니다.


  - 아름다운 모습들 -

   천변의 산책로를 따라 분주히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입니다.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거의 달리듯이 걷는 아가씨는 내 앞을 쌩쌩 지나쳐버립니다.

그 뒤를 중년 남자가 속도를 내지만 조금 벅찬 것 같습니다.

커다란 체구의 아주머니는 많이 힘겨워 보이지만 멈추지도 서들지도 않습니다.

  젊은 부부는, 데리고 나온 강아지가 제멋대로 촐랑거리는 것을 챙기느라 덩달아 우왕좌왕합니다.

강아지 운동을 시키는 건지 부부가 운동을 하러 나왔는지 헷갈립니다.

아기가 탄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걷고 있는 젊은 부부는 운동보다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바쁜 듯 합니다. 

장애인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아내의 모습은 유난히 착하고 정다워 보입니다.

  한 시간 반 만에 출발점인 정동교에 도착했을 때는 속옷도 촉촉이 젖었습니다.

부근의 잔디밭에서 풍기는 고기 굽는 냄새는 아직도 천변을 떠다닙니다.

천변은 운동으로 살을 빼려는 사람들과 고기로 살을 찌우려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그러나 멈춰 있는 사람들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에 한여름의 천변은 활기가 넘칩니다.

  내가 여름날 저녁에 매일 천변 걷기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운동이지만,

천변의 군상들이 펼치는 천태만상을 보는 재미를 덤으로 얻으니 일거양득입니다.

때로는 덤이 더 커 보이는 때도 있으니, 정읍천이 가까운 곳에 사는 것도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6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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