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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여행기

    

                캄보디아 여행기

 

  * 첫째 날(1.15) *

  2007년 1월 15일,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손꼽아 기다리던 캄보디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11시 30분에 인천공항 행 리무진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 성동회원 내외 열네 명은

한결같이 기분 좋은 모습들이었습니다.

성동회가 결성된 지 24년, 그리고 해외여행을 위해 경비를 조금씩 쌓아온 지 10여년!

흐른 세월만큼 우리들의 우정도 야무지게 여물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2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듣던 대로 아시아 최대의 공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위용은 거대하고 위압적이었습니다.

입국 서류 몇 가지를 작성하고 나서, 여름옷이 든 가방을 챙긴 뒤 입고 있던 겨울 옷가지를 보관실에 맡겼습니다.

  아직 시간 여유가 많은지라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도 하고 오가는 내외국인들의 모습을 괜스레 훑어보기도 했습니다.

면세점에서는 즐비한 명품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고급스런 모양만큼이나 값도 여간 아니었습니다.

 

  저녁 7시, 우리 일행을 실은 아시아나 항공기가 한참 동안 활주로를 미끄러지더니 힘차게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항과 주변의 불빛이 환상적으로 펼쳐졌습니다.

  비행기가 항로를 제대로 잡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도시락을 비롯하여 술과 음료가 기내식으로 제공되었습니다.

 허기를 느끼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맛있게 먹었지만, 식후엔 지나친 포만감으로 한참을 시달렸습니다.

  좁은 공간에 안전벨트를 맨 채 다리초차 맘 놓고 뻗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있으려니,

케이지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있는 양계장의 닭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해외여행이라는 거대한 주제 앞에 이 정도는 너끈히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무료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간간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외에 다른 것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 장면이 바뀌는 것이 있다면 기내의 천정에 매달린 소형 텔레비전 모니터가 전부였습니다.

- 현재 시각 10시 07분, 서울 시각 12시 07분, 고도 9448미터, 속도 시속 827킬로미터, 바깥 온도 영하 32도 -

  모니터가 알려주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이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려보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닫아두어야 한다는 스튜어디스의 멘트가 생각나서 열어보기도 겁이 났습니다.

잠시 후에 씨엠립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기내의 사람들은 안도의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시각 11시 08분, 나는 인천공항을 떠난 지 여섯 시간 만에 캄보디아 땅에 역사적인 첫발을 디뎠습니다.

  2시간의 시차를 생각하면 지금 한국은 새벽 1시 08분이니 여느 날 같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입니다.

씨엠립공항 청사의 규모는 우리나라의 중도시 버스터미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자그마했습니다.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서니, 한국인 가이드와 눈에 설지 않는 낡은 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산 버스를 이 곳에서 만나다니, 이국에서 아는 이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습니다.

차창 밖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가운데 아열대의 수목과 건물들이 이국적인 기분을 자아냈습니다.

밤공기는 상쾌함보다는 메케하고 눅눅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습니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인 로얄앙코르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러 여장을 풀고,

 캄보디아에서의 첫 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비교적 객지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이 날은 피로 때문인지 뒤척임 없이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의 화려한 여행길을 꿈꾸며…….

 

* 둘째 날(1.16) *

  여섯 시경에 눈을 떴지만, 창 밖에 대한 호기심으로 더 이상 드러누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씨엠립의 아침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일터로 가는 듯한 주민들의 자전거 행렬이 늘어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도로는 자전거로 매워지다시피 했습니다.

  두 세 명이 함께 탄 오토바이가 자전거 사이를 휘저으며 달리기도 했습니다.

간간이 트럭도 보이지만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이들의 주된 교통수단인 듯 합니다.

  이 곳에서 처음 대하는 아침 식사의 뷔페식 메뉴에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채소류도 있지만 낯선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현지 음식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몇 입 먹어보니 먹을 만 했습니다.

준비성 많은 몇 회원들이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과 김을 곁들이고 나니,

고국에서의 입맛이 금세 되살아나며 불현듯 집에서 먹던 김치와 된장국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아침 식사를 미치고 호텔 정원에 나가니 벌써 후덥지근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이 곳의 계절로는 겨울이라지만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에 가까웠습니다.

정원에는 야자수를 비롯한 낯선 나무와 풀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국산 중고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 회원 부부 열네 명과

서울에서 온 두 명의 여인들이 한 팀이 되어 사흘 동안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가이드 한 명을 비롯하여 현지인 가이드 한 명,

현지인 운전기사 한 명이 우리들의 수송과 안내를 맡은 모양입니다.

  가이드의 농간으로 마음 상하는 여행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우리들의 가이드는 첫 인상이 좋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진실성이 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습니다.

현지인 가이드 역시 우리말과 영어를 조금씩 할 줄 알고, 표정엔 순박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것도 여행길의 행운 중의 하나입니다.

 친절한 가이드는, '안녕하세요.'는 캄보디아 말로 '섭섭하이!'이고, '고맙습니다.'는 '어쿤!'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두 마디만 사용해도 캄보디아인들은 좋아한다는 말에,

우리 일행은 입에 익혀두려 몇 번이고 반복하며 어설픈 연습을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바콩사원이었습니다.

  입구에서는 불과 10분 만에 즉석 사진을 찍어 붙인 40불짜리 명찰 모양의 관광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이 카드를 분실하면 큰 낭패를 볼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지레 겁을 먹은 우리들은

목에 단단히 걸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확인 또 확인했습니다.

  이 사원은 9세기말에 지은 크메르 왕국 초기의 쉬바신을 숭배하기 위한 사원이라 했습니다.

바콩사원은 보통 사람들의 범접을 허락하지 아니하듯

높이 15m의 거대한 외벽에 둘러싸여 있고, 수십 개의 뾰족한 탑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 거대한 구조물이 모두 돌이라는 것과 웅장함도 그러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온갖 아름다운 형상의 조각과 문양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돌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다루는 기술이 있었던지

그 섬세함과 예술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바콩사원이 후대의 앙크르와트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니, 내일 찾아갈 또 다른 사원들이 벌써부터 기대되었습니다.

쉼 없이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을 가리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모습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가상스러웠습니다.

  이 곳의 여행에는 선글라스와 손수건이 기본 준비물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가지고 온 모자도 있었지만, 현지의 아이들의 애처로운 손길 때문에 구입한 1달러짜리 모자가

이 더위에는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점심때 한식식당으로 들어서니, 무엇보다 코끝을 간질이는 우리 음식 냄새가 가장 반가웠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불과 하루인데 말입니다. 깍두기, 콩나물무침, 청국장찌개,

돼지고기볶음 등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한국 음식을 마주하니 우리 것에 대한 고마움이 절로 우러나오는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점심을 마친 일행은 호텔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앙코르톰을 찾았습니다.

앙코르톰은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의 유적 중에서 앙코르와트와 더불어 가장 눈에 띄는 유적입니다.

  12세기 당시 인근에는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앙코르톰은

사원이라기보다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는 설명에 공감이 갔습니다.

크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앙코르와트라면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은 바로 앙코르톰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주종을 이루었던 목조 건물은 모두 없어졌으나,

지금 남아있는 석조물만으로도 그때의 웅장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제법 규모가 큰 식당으로 안내되었으며, 메뉴는 뷔페식이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지만,

회원 중 한 사람이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을 곁들여서 겨우 입맛을 돌려놓았습니다.

  잠시 후에는 무대에서 캄보디아 민속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기대를 갖고 주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해지는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합니다.

민속무용은 이들이 받드는 신에게 기구하는 모습과 동작들이 반복되는 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이 곳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 부족과 우리나라의 문화에 젖어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이틀째 여행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온 우리 일행은 여행에 관한 한담을 나누면서 맥주 몇 잔씩을 마셨습니다.

고국에서 가져온 멸치와 고추장 안주가 일품이었습니다.  

 

 

* 셋째 날(1.17) *

  아침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쉰 다음 10시 반쯤 되어서야 이번 여행의 중심인 앙코르와트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이드도 신바람을 내며 지루하다싶을 만큼 앙코르와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했습니다.

  막상 눈앞에 마주 대하니‘새롭게 조명 받는 세계 7대 불가사의’답게 그 웅장함에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12세기의 이 곳 사람들은 무슨 재주로 이렇게 웅장한 예술품을 빚어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합니다.

  앙코르와트는 12세초에 크메르왕조가 37년에 걸쳐 공들여 지은

 '사원의 도시'로, 앙코르 유적 가운데 백미를 이룬다고 합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인 이 구조물들을 만드는 데는 적잖은 세월과 수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임은 물문가지입니다.

당시의 제왕은 이 사원이야말로 신과 동일시되는 통치권자의 사후 안식처이고,

국가의 번영과 백성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것이라며, 거대한 공사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사원 입구에서 '1달러!, 천원!'을 외치며 물건을 팔고 있는 캄보디아 사람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가는 곳마다 진을 치고 있는 노점상들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부터 깡마른 노인들까지 온 가족이 나온 듯했습니다.   

아득한 옛날 제왕이 신의 이름으로 약속한 행복이 이런 건 아닐 터인데…….  

 

 

  오후에는 특산물 매장에 들렀습니다.

건강장수를 보장한다는 수백 년산 상황버섯 매장을 비롯하여 편안한 잠자리를 약속한다는 라텍스 베개 매장,

갖가지 보석이 즐비한 보석 샵 등을 돌아보면서,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장과 간부들은 한결같이 한국인이었으며, 직원들도 대부분 한국인에 약간의 캄보디아인이 섞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이 세계 도처에 진출하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지만,

이렇듯 환경이 열악하고 가난한 나라에까지 와서 사업을 한다니 한국인의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캄보디아 식 샤브샤브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호텔로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야외 노래방에 들렀습니다.

마당 전면에는 자그마한 무대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 몇 개의 탁자가 놓여있었으며,

우리 대중가요가 이십여 곡 나열되어 있는 노래 목록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맥주를 주고받으며 무대에 올라가 노래와 춤을 즐겼습니다.

캄보디아의 밤하늘 아래 한국에서 익힌 노래방 실력을 마음껏 뽐낸 일행은

여행의 피로를 풀 겸 부근에 있는 마사지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십 명은 족히 될 듯한 소위 마사지 걸들이 양편에 도열한 채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머쓱했지만, 발동하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마사지 학교를 수료했다는 이국 여인들이 1시간 남짓 온몸을 주물러댔습니다.

그 덕분인지 며칠 동안 피로에 젖은 몸이 다소 풀려 캄보디아에서의 사흘째 밤은 수월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 넷째 날(1.18) *

  마지막 날인지라 한 곳이라도 더 보고 가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먼저 가보기로 한 곳은 씨엠립에서 15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고 세계에서 세 번째 넓다고 하는 톤레삽 호수입니다.

  움푹움푹한 도로를 털털거리며 달리는 버스의 창밖으로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눈앞에 닿을 듯 보였습니다.

그럴듯한 양옥도 간간이 보였지만, 대부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집과

허름한 차림으로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가족들이 스쳐갔습니다.

  마당 한 구석에 우리 상표가 선명한 휴대용가스를 담았던 

빈 깡통들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폐품으로 들여온 것들이라는데,

이 곳에서는 소중하게 쓰인다 하니 참 신기했습니다.

 

  선착장에 가까울수록 길의 요철이 심해지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광활한 황토 빛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바다라 해도 좋을 만큼 드넓었습니다.

선착장에는 작고 허름한 배들과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그 중에는 어린이들과 노인들도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작고 낡아빠진 통통배는 우리 일행을 태운 채로 기우뚱거리며 호수 일주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불안하여 난간을 꽉 붙들어 잡았으나, 선장의 느긋한 표정을 보고 나니 나도 덩달아 편안해졌습니다.

  호수는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배 모양의 수상가옥과 그 곳에서 기거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가족들이 보였습니다.

한결같이 남루한 옷차림과 그을린 얼굴들. 몇 가지 소품과 바나나를 양손에 들고 '천원, 1달러'를 외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은 대부분 이러했으나, 표정만은 소박하고 근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들의 행복지수가 선진국보다 높다는 게 맞나봅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한 아이는 우리가 탄 배를 향해 바나나를 흔들며 사달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안쓰러웠던지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빵 봉지를 전해주려 손을 뻗다가 그만 물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돌아섰으나, 우리 일행은 한참 동안을 안타까워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한다는 선상학교와 한국어 간판이 호수 위에서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국인의 발길이 여기에도 닿아 있다는 게 또한 놀라웠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조금 전에 본 모습들로 채워져 한동안 호수 위를 떠돌고 있는 듯했습니다.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호수에 운명을 맡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영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캄보디아로 피난 와서 이 곳에 정착했다는 이들은 정녕 버림받은 사람들인가?

이들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마친 나는 일행과 함께 시장에 들렀습니다.

시장 안의 비좁은 통로에는 오가는 사람들과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물건들이 쌓여있는 모습은 60년대 우리나라 시장의 모습과 비슷했으며,

쪼그리고 앉아 간단한 음식을 사먹는 아낙의 모습도 그리 낯설어 보이지가 않습니다.

다만 그 곳 시장의 독특한 냄새가 너무 역겹고 익숙하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녁에 찾은 평양냉면 식당은 무엇보다도 평양아가씨들이 직접 서빙도 하고 공연도 한다기에 큰 기대를 안고 들어섰습니다.

드넓은 공간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식탁 사이로 빨간 제복에 활짝 웃는 모습의 평양아가씨들이 눈에 띠었습니다.

  똑같은 옷과 똑같은 말투에 한결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비롯한 무용,

연주 역시 직접 대하는 것은 처음인데도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애틋함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식당을 나온 일행은 부부끼리 동승하여 모터 달린 인력거 모양의 캄보디아식 택시를 타고 시내투어에 나섰습니다.   

차선도 없는 어둠침침한 씨엠립 거리를 털털거리며 달리고 있으려니, 택시 안에서의 야경 구경은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나는 캄보디아의 마지막 밤 풍경을 눈에 담느라 쉼 없이 두리번거렸습니다.  

 

 

  이제 캄보디아 여행을 마감할 시간입니다.

우리 일행은 호텔로 들어와 짐을 싸며 이국에서의 추억거리도 함께 챙겼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 동안 정들었던 안내원들과 이별한 뒤,

캄보디아 시각 23시 50분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씨엠립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나흘 동안의 캄보디아 여정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거대한 사원들과 천 원짜리 물건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함께 겹쳐 지나갔습니다.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몸은 점점 나른해지고 눈꺼풀도 무거워집니다.

                   ≡ 2007. 1. 15 - 1.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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