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기억
부안의 영수동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다섯 살 때까지 거기에 살았다지만,
그 곳에서의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수동에 살 때엔 할머니께서 낮에는 등에 업으시고, 밤에는 품 안에 둘 정도로 나를 예뻐하셨다 합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할머니에 대한 일은 단 한 가닥의 기억도 없습니다.
그러니 할머니께 불효막심한 손자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기억은 배양구지로 이사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기억 중의 하나는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내 뇌리 속에 각인된 듯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배양구지로 이사 올 당시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6․25전쟁의 와중에 피난처를 찾던 중,
영수동에서 들판 길로 삼십 여리 떨어진 이 곳 배양구지를 택해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영수동에 사실 때 발동기를 다루셨는데,
농사철에는 이 발동기를 끌고 이 곳 배양구지 근처까지 와서 논에 물을 품어 주곤 했습니다.
그게 배양구지와의 인연이라면 인연이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가친척 하나 없는 마을에 들어온 우리는 내 집은 고사하고 셋방살이도 그저 고맙기만 했습니다.
인심 좋은 배양구지 마을 사람들 덕분에
우리 세 가족은 비좁은 단칸방에서 몸을 부비며 낯설고 힘겨운 타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한결같이 어려운 형편이었을 테지만,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 인심 덕분에 우리 가족은 조금씩 정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 잃을 일은 하지 않았던지 타향살이의 설움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낯선 곳인데다 숫기마저 없었던 나는 마을 아이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 하고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날도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잠자리 꽁무니를 따라 마당을 몇 바퀴 돌고 나면 힘에 부쳐 이내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노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마루에서 옷을 꿰매고 있던 어머니께서 간간이 눈길을 주셨습니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일없이 금을 그어대고 있던 나는,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루에서 옷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노래를 생전 처음 들었습니다.
구슬픈 가락에 이끌린 나는 토방 아래로 바싹 다가가서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던 어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으며,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돌아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들썩이는 어깨 너머로 외롭고 고달픈 모습을 감추신 채 한 동안 입을 다무셨습니다.
한참 후에야 자리를 털고 부엌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등 뒤로 한 줄기 저녁 햇살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설움 섞인 노랫소리, 한참 올려다보였던 높은 마루, 마당에 길게 늘어선 석양의 그림자들…….
이들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첫 기억의 속의 애틋한 모습들입니다.
요즘도 생면부지의 타관에서의 피난 생활과 셋방살이로 힘겨웠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 1952년 무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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