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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나들이보고서

장흥에서 정읍을 만나다.

 

                      장흥에서 정읍을 만나다.

 

 

  2014년 2월 20일, ‘정읍시문화답사회’의 제136차 문화답사는 전남 장흥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이날은 雨水 다음날로 화창하고 포근하여 마치 봄날 같았다. 장흥은 인구 4만여 명으로 비교적 작은 지역이지만, 유무형의 문화적 자산이 많은 곳이었다.

 

  ▣… 보림사

   정읍 내장사에는 지방문화재인 ‘이조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종은 내장사 중건 당시 장흥의 보림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조동종’의 고향이 이날 찾은 장흥 보림사인 셈이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보림사와 내장사가 이런 역사적 인연이 있다는 것을 내가 해설사에게 알려주었다.

   통일신라 말기 지어졌다는 보림사는 복원 및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지산 밑에 자리 잡고 있으나 앞이 탁 트여있어 평지나 마찬가지였다. 1,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로, 한때는 20여 채의 전각에 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위용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절 역시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대여섯 채만 남아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사천왕상에서는 ‘월인석보’ 등 국보급 고서적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하니, 역사적 가치가 예사롭지 않다. 경내로 들어서니 대적광전 앞에 국보 44호인 3층석탑 두 개가 버티고 서 있다. 마치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는 것 같다. 두 탑 사이에 서있는 석등에서는 1,000여 년 전 석공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대적광전 안을 들여다보니 국보인 철조불상이 있었는데, 철로 만든 불상은 처음 보았다. 이 사칠이 국보 2점에 보물 8점을 보유하고 있는 걸 보면, 보림사(보물의 숲)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사찰인 듯싶다.

 

  ▣…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장흥과 정읍은 역사 속의 인연을 또 하나 갖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가 정읍이라면, 농민군의 최후의 격전지가 이곳 장흥이다. 기념탑에서 내려다보이는 들판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혈투를 벌인 곳이란다.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의 처절한 전투가 보이는 듯하다. 농민군이 일본군의 신무기에 맞서 싸우다 패퇴하기는 했지만, 제폭구민의 정신만은 곳곳에 스며있는 듯했다. 정의의 불꽃이 정읍에서 시작하여 이곳 장흥에서 마감되었으니, 두 고을의 인연이 아닌가.  

 

 

 

  ▣…방촌유물전시관

   천관산 자락에 자리잡은 방촌유물전시관 호남실학의 대가인 위백규 선생과 방촌마을의 유물이 모아져 있었다. 작은 고을에 일찍이 정신문화가 발전된 것도 예사롭지 않았으며. 유물들을 모아 전시관을 마련한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을이 많은 문학인을 배출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정남진전망대

   정남진이라는 이름을 붙인 착상이 우선 눈길을 끈다. 장흥의 한 지역이 서울 광화문의 정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브랜드화하여 이를 관광자원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정동쪽에 정동진이 있다면, 수직으로 정남쪽에 장흥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과 안목에 박수를 보낸다. 정남진전망대는 10층에 46m의 높이로 다도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이날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렸으니, 좋은 날 택해서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다.

 

▣…천관문학관

   장흥에서 글자랑 말라는 말이 맞았다. 한국 문단의 거목인 이청준 소설가를 비롯하여 유명한 작가가 이 고을에서 다수 태어났으니 그 말이 나올 법하다. 천관산 품 안에 자리 잡은 천관문학관 안에는 이 고장 출신의 작가들의 면면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렇듯 문학인을 챙겨주는 고을에서 태어난 작가들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랫줄 가운데는 난데요. 대작가들 틈이 끼어 어설픈 작가 흉내를 내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