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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야기★/*나들이보고서

남자의 숙제, ‘천왕봉 등정’

 

남자의 숙제, ‘천왕봉 등정’

 

-  시작하며 -

  2012년 5월 21일, 역사적인 지리산 천왕봉 등반에 나서는 날입니다. 내 생애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는데, 60대 중반을 넘어서야 늦은 시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산우(山友) 네 명이 의기투합하여 도전하게 되었는데, 내 나이가 반 발 정도 앞서기는 했지만, 평균연령 65세로 거기서 거기입니다. 나이로 보면 다소 무모한 도전으로도 보이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한번쯤은 시도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

  이날은 녹음이 짙어가는 봄의 끝자락에, 날씨마저 완전한 우리 편이었습나다,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으니, 등정의 성공 여부는 나 자신의 체력과 의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천왕봉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00번지이며, 지리산의 최고 봉우리로 해발 1915미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지만, 산의 규모로는 단연 으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읍에서 지리산 중산리 탐방안내소까지는 205킬로미터에 승용차로 2시간 50분 소요된다 하니, 가히 장도에 올랐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침 6시, 일행을 실은 승용차는 텅 빈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2시간 반 만에 중산리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텅 빈 주차장엔 몇 몇 청소원들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여유롭게 출발 지점에 도착했으니, 첫 단추는 일단 무난하게 끼운 셈입니다.

  우리가 등반해야 할 경로는, 중산리지리산탐방안내소→순두류자연학습원→로타리대피소→개선문→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유암폭포→홈바위교→칼바위→야영장→중산리지리산탐방안내소입니다.

 

  - 출발은 가뿐했으나 -

  우리를 실은 법계사 행 셔틀버스는 숨을 헐떡이며 좁고 가파른 구불 길을 감돌아 올라 10분 후에 종점인 순두류학습원에 도착했습니다. 이 길을 걸어왔더라면 1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하니, 셔틀버스가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등반입니다. 그러나 초입부터 등산로는 평탄치가 않습니다.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보이는 건 나무와 바위 뿐, 시야에선 이미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돌을 끊임없이 밟아야 했으며, 때로는 바위 사이를 겨우 비집고 통과했습니다. 늘여놓은 밧줄에 몸을 의지할 때는 그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습니다. 경사 70도가 넘어 보이는 계단을 수없이 오를 때는 짊어진 배낭을 벗어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간간이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응원을 해주듯 활짝 웃어준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눈앞 엔 카메라에 담아야 할 것도 많지만, 그걸 꺼내고 집어넣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잠시 주저앉아 이정표를 바라보고 남은 거리를 확인해보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함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느긋하게 고쳐먹었습니다.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하여 짐을 벗어놓고 오이와 방울토마토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비교적 오랜 시간 쉬었습니다. 주변 언덕엔 금낭화 무리가 분홍색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집채보다 큰 바위 뒤쪽을 내려다보니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그 위엔 구름 헌 점 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올라온 거리 3킬로미터, 올라가야 할 거리 2킬로미터라지만, 한결 어려운 험로가 기다리고 있을 듯합니다.

 

 - 오르고 또 오르면 -

  시간 관계상 법계사는 들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장관을 이루며 펼쳐져 있습니다. 그 장대함에 대책없이 압도됩니다. 꽤 높이 올라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내가 밟고 올라가야 할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등산로가 갈수록 가른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등산로라기보다 온통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의 연속입니다. 한참을 오르니, 눈앞에 웅장한 두 개의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지리산 개선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천왕봉은 앞으로 0.8킬로미터나 남은 걸 생각하면 아직 개선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 신호가 왔습니다. 양 다리가 번갈아가며 몇 차례 쥐가 납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심해지면 안 되겠다싶어 준비해온 에어파스를 연이어 뿌리면서 견뎠습니다.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노인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서울에서 혼자 왔으며 나이가 이른 셋이라는데, 짱짱해 보입니다. 한 참 연하인 내가 다리 좀 아프다고 어정거릴 때가 아닙니다. 시조의 글귀도 있지 않은가! ‘오르고 또 오리면 못 오를 리 없건만은~’

  간간이 고사목들이 나타나는 걸 보니 정상이 가까워졌나 봅니다. 이 높고 험한 산골짜기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옅은 보랏빛 꽃잎이 너무 청초하고 맑아 안쓰럽기조차 합니다.

 

 - 천왕봉의 허락을 받고 -

  드디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떡 버티고 있습니다. 마지막 오름길을 한걸음에 오르니, ‘천왕봉’이라는 표지석과 주변의 넓은 고원이 나를 맞았습니다. 지리산의 위용은 듣던 대로 역시 장대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순두류자연학습원에서 출발한지 5시간 만인 오후 2시 반이입니다.

  오래 전에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남자의 숙제, 지리산 천왕봉 등정’을 드디어 이룬 순간입니다. 그 기쁨을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이 하찮은 중생에게 해발 1915미터의 장대한 정상을 밟도록 허락해준 지리산과 천왕봉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용케도 잘 견뎌준 예순 여섯의 내 육신을 다독거리며 잠시 자화자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천왕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한 인증샷은 필수! 묵직한 카메라를 끙끙거리며 메고 온 것도 사실은 이 순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드높은 산줄기를 내려다보며 먹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늦은 점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어둡기 전에 출발 지점에 도착하려면, 천왕봉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음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 하산 길로 접어들다. -

  이제부터는 하산 길, 몇 걸음 내려오니 제석봉입니다. 드넓게 펼쳐진 땅에는 죽어서도 짱짱하게 서 있는 고사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한 풍경에 절로 발길이 멈춥니다. 간간이 누워있는 것들도 보였지만, 긴 세월 풍우에도 끄떡없이 서 있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극기훈련을 온 듯, 한 무리의 중학생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갑니다. 장터목 방면에서 올라오는데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입니다. 장터목대피소에 이르니 제법 사람 냄새가 납니다. 쉼터에는 수십 개의 배낭이 즐비하고 약수터에도 사람들로 붐빕니다. 오늘 밤 여기에서 야영을 할 사람들로 보입니다.

  우리 일행의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지고 휴식 횟수도 줄여갑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돌들이 박힌 길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고 거의 다 왔다는 표지도 없습니다. 7시가 가까워오니 슬슬 걱정이 됩니다. 어둑해진 시야에 곰을 조심하라는 안내글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친 몸을 챙길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극한 상황의 힘인가?

 

 - 드디어 원점 회귀 ! -

  드디어 탐방안내소에 이르렀습니다. 회귀 시각이 7시 반이니, 출발한지 10시간 만입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주차장에서 우리 일행은 천왕봉 등정과 무사 귀환을 자축했습니다.

  그날 하루 우리를 무사히 안아 주었던 지리산은 어둠 속에서도 묵직하고 늠름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 2012년 5월 21일 월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