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에 가을의 방점(傍點)을 찍다.
지난주엔 문중 시제 참석차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남녘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차창밖 늦가을의 풍경은 왕성한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 스산한 침묵으로 스쳐갔습니다.
벼를 걷어낸 후 널따랗게 드러누운 들판은 내공을 다지며 내년 봄에 다시 쓰일 힘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만추의 논은 정중동의 전형처럼 조용했습니다.
녹음과 단풍의 호시절이 있었던 야산의 나무들도 몸집이 가벼워졌습니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내는 것은 겨울 채비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버림으로써 존재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풍성한 잎을 얹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탱탱하니 힘이 있어 보입니다.
나무들은 겨울을 온몸으로 이겨내기 위한 준비 태세를 다 마친 듯 의연하기까지 합니다.
동행한 어르신들의 연세는 여든에 가까우니 계절로 말하면 만추에 가깝습니다.
그 분들의 노익장으로 보아 겨울이라 하기엔 가당치도 않습니다.
시골에서 흙과 더불어 살아왔지만 삶의 깊이가 담긴 말씀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소박한 한마디 한마디가 위인들의 명언에 못지않습니다.
“잘 헌다는 소리는 못 들을망정 죄는 짓지 말고 살아야제.”
“조상을 잘 모시는 것도 복을 받자고 허는 일이 아녀.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돌봐주시면 그걸로 족허지. 안 그렁가? 동상들.”
“암요. 그렇다마다요.”
만추를 닮은 어르신들의 농익은 이야기들로 차안은 훈훈하기만 합니다.
만추는 결코 들뜨거나 화려하지 않는 대신 안으로 옹골찹니다.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으며, 거둘 건 거두고 버릴 건 버립니다. 마치 그날의 어르신들처럼 말입니다.
만산홍엽의 화려한 시절이 지나갔다고 마음마저 허전해 할 것은 없습니다.
가을의 끝자락엔 만추라는 속 깊은 맛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만추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순리에 따라 분별해주는 계절이니, ‘제대로 철이든 철’입니다.
가을의 방점(傍點)은 만추입니다.
- 2011. 11.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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